기타리스트 J
차세란
너희들 왜 이렇게 얼굴들이 훤해졌어?
다들 예뻐졌네. 뭘 먹고 이렇게 회춘을 한 거야!
J! 넌 눈화장도 짙게 하고, 스팽클 박힌 셔츠도 입고 모범생이 무슨 바람이라니.....
바람은 무슨.... 밴드 연습 때문에 이러고 왔다.
보기 좋아. 너 여전히 밴드 활동 열심이구나.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못 한다더니 다시 시작했나 보네.
나와 40년 지기 친구들은 시내의 한 식당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 긴 세월을 지내왔으면서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약간은 과장되고 야단스러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여고 동창생들이다. 이 친구들만 만나면 알싸한 바람에 코끝이 찌르르하던 사십여 년 전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봄날로 돌아간다.
갑자기 당겨진 등교 시간, 한쪽 어깨가 기울어질 정도로 무거웠던 책가방, 20분 이상을 숨이 턱에 차도록 뛰다시피 해야 나타났던 언덕배기 학교는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의 진을 다 빼 놨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교실 문을 열면 60여명의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어리버리 하고 내성적인 나는 영화 '여고괴담'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닌다 한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에게 학교는 군대나 감옥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다행히 이 친구들 덕분에 나는 3년의 여고 시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사실 우여섯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도시락을 함께 먹고, 매점으로 뛰어다니며 자연스레 친해졌겠지만, 무엇보다도 학교 앞 5분 거리의 J의 집에 하루가 멀다하고 몰려가 놀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집도 가까웠지만 그곳은 우리에게 ‘원더 랜드’였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이었지만 사교육 전면 금지로 방과 후 우리는 제법 자유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우르르 몰려간 우리가 육중한 J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잔디가 깔린 마당이 펼쳐졌다. 몇 걸음 떨어진 현관문 안쪽 한 면에는 붙박이 신발장이 있었는데, 그 위로 올망졸망한 화분들이 줄 서서 우리를 반겼다. 직사각형의 거실 주위로 화장실과 J와 언니가 함께 쓰는 방 그리고 2층으로 향한 계단이 있고, 계단 밑으로 주방과 안방이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여름에는 대자리가, 겨울에는 카페트가 깔렸다. J의 어머니는 귀찮은 내색 없이 우리를 반겨 주셨는데, 가끔 롤케이크와 진짜 델몬트 주스를 내주셨다. 집에서 먹어 볼 수 없었던 그 간식거리에도 눈이 번쩍였지만 그분의 자연스럽게 곱슬거리던 단발머리는 생경했다. 짧은 커트에 뽀글거리던 파마 머리의 엄마에게 익숙했던 나에게 갸름한 얼굴에 쌍거풀진 눈망울을 깜빡거리던 그분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J와 J의 언니는 어머니를 거의 닮지 않아 평범한 외모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저녁 시간 전까지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만화책을 읽고, 끝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금기 사항이 하나 있었으니, 그 집의 2층에는 올라갈 수 없다는 거였다. J에게는 무서운 대학생 오빠가 있었는데, 그 오빠 때문에 2층에 올라가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장마가 시작되었던 초여름의 어느 날, 그 오빠가 긴 여행을 떠났다 했고, 마침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전격적으로 2층 탐사에 나섰다. 방 3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각각은 오빠 방, 아버지 서재 그리고 막내 동생 방이라고 했다. 드디어 문을 열어 본 오빠의 방은 실로 충격이었다. 큰 침대 옆 벽면에 비스듬히 세워졌던 일렉트릭 기타! 검정색 기타는 자체 발광을 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줄 튕기면 소리가 나?
야 만지지 마! 그거 조금만 건드려도 우리 오빠 딱 알아봐. 눈으로만 봐라!
생각지도 못한 신문물(?) 앞에서 우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테이프로만 듣던 일렉트릭 기타라니... 끝내, 우리는 그것을 만져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기타 연주를 직접 해 본 듯한 환상에 빠져 그날 이후로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멋들어졌던 락을 열심히 들었다.
1학년을 마치고 문·이과로 나뉘는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반이 갈라졌고 대학 진학 준비로 바빠지면서 J네로의 발걸음은 뜸해졌다. 그렇게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던 우리의 학창 시절은 저물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우리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우리의 만남은 확연히 줄었다. 몇 년간 못 만나기도 하고, 연락이 끊기기도 했지만, 용케 인연의 끈은 놓지 않았다.
아이들의 중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날, 우리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있었다. 남편, 아이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 문득 J네의 일렉트릭 기타가 화제로 떠올랐다.
너희 오빠 아직도 기타 연주 하시니? 그 집 아직 그대로 있지?
그런데 J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게.... 그 집 이제 우리집 아냐. 실은 오빠가 사업한다고 집을 담보로 몇 번 대출을 받았는데 사업은 실패하고 그러다 집은 결국 경매로 넘어갔어. 그 충격으로 엄마, 아버지는 별거 중이시고, 건강도 망가지시고... 오빠는 오빠대로 면목이 없으니 혼자 엄마 모시고 사는데 연락도 잘 안 한다.
한참 동안 먹먹한 심정을 추스르지 못해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우리 청춘의 한 페이지가 찢겨나간 듯했다. 결국 J에게 별 위로도 되지 못할 공허한 말들만 떠들어대다 헤어졌다.
그 후로 또 몇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인생의 대부분은 우중충한 날씨에 먹구름이 끼었고, 비가 쏟아지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밝은 햇살을 볼 수 있는 날은 가끔 그리고 아주 잠깐뿐이었다.
십여 년 전인가 애들 대입 축하로 모였던 우리에게 J는 느닷없이 자신의 이혼 소식을 전했다. 신혼 초부터 고부갈등과 기센 손 위 네 명의 시누이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결국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던 J는 오랜만에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 대신 J는 직장도 열심히 다니고, 옛 대학 동창들과 밴드 활동을 한다고 했다. 자신은 일렉트릭 기타를 맡고 있는데 프로 기타리스트에게 레슨도 받아 가며 열심히 실력을 연마 중이란다. 우리는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어렸을 때 만져보지도 못했던 그 기타를 이제는 원 없이 쳐 보는구나. 대단하고 부럽다.
3년 전 눈발이 흩날리던 연말, 홍대 앞의 어느 공연장으로 우리는 꽃다발을 들고 몰려갔다. 무대에 선 이들은 주름진 얼굴과 희끗한 머리가 무색할 만큼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를 열광시켰다. 찢어진 청바지에 반짝이는 티셔츠를 걸친 J의 등장에 우리는 있는 힘껏 함성을 질러댔다.
"Cum on feel the noise∼!♪♪♬”
기타리스트 J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