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입다
황선금
서울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갔다. 소한 추위는 꾸어서라도 한다는 속담이 실감 나는 한겨울이다. 살이 에이는 듯한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다가 문득 어린 시절 옷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1960년대, 유독 가난했던 우리 집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니, 새 옷을 장만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 시절 흔히들 입었던 고르덴 옷이나 안감 속에 스펀지가 들어있던 나이론 잠바 따위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그 기억, 가난했던 시절을 함께한 옷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까슬까슬한 군용 담요로 만든 두툼한 바지와 성조기가 그려진 자루에 들어 있던 구호물자 못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가난했던 시절을 함께한 옷들이다.
어머니가 어디서 그런 군수품을 구해왔는지는 모른다. 군인 가족에게서 얻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버지가 막걸리 몇 잔과 맞바꾸어 왔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군복과 담요, 양말 등으로 나와 세 남동생의 옷을 지어 입혔다. 면실로 짠 군인 양말을 일일이 풀어 그 실로 스웨터를 손수 짜 주었고, 군복을 재단해서는 봄가을에 바지를 만들어 주었으며, 합성 섬유로 짜인 두툼한 군용 담요로는 겨울 바지를 만들어 주었다. 담요 바지는 무겁고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맨살에 닿으면 까슬거렸지만, 어머니가 내 몸에 맞춰 짜준 옷이었기에 나름 괜찮은 옷이었다. 다만, 헌병에게 걸릴까 두려워 늘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했다.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가 가까운 우리 동네는 군사지역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마을이라서 헌병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그들은 동네를 돌며 군수품이 발견되면 압수했고, 심지어 집안 곳곳을 뒤져 막걸리를 담근 항아리를 통째로 빼앗아 가기도 했다. 헌병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철모는 일반 군인들의 철모와는 달리 까만색이었고, 대문짝만한 하얀 글씨로 ‘헌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팔에 두른 완장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헌병’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차가 멀리서 희끗거리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열한 살 때,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을 맞이할 즈음이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담요 바지를 입고 친구와 함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헌병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신작로 옆 도랑으로 뛰어들어 납작 엎드렸다. 헌병차가 지나가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도랑에 얼굴을 처박고 온몸을 웅그렸다. 혹여 헌병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옷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잡혀갈까 가슴을 졸이며 숨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집에서 사용한 아기 포대기도 군용 담요였다. 막냇동생이 그해 봄에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출산 후 심하게 앓으셨다. 젖을 먹지 못한 아기는 계속해서 울었고, 나는 아기를 업고 밖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골목에서 헌병이 불쑥 나타나면 나무 낟가리 뒤에나 변소에 뛰어 들어가 부리나케 숨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옷은 구호물자로 받은 옷이다. 하루는 미국에서 보내온 옷이라며 어머니가 자루에서 옷을 꺼내 마루에 펼쳐놓았다. 소독약 냄새가 지독했는데 갑자기 여러 벌의 옷이 생길 것 같은 마음에 들떠 이 옷 저 옷을 들춰보며 몸에 걸쳐 보았다. 팔 길이는 내 팔 두 개를 이어도 남을 만큼 길었고, 바지도 크고 어딘가 어색한 모양새였다. 어머니가 그 옷을 몸에 맞게 수선해 주었지만, 나는 왠지 그 옷은 입기가 싫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옷매무새가 낯설었고, 학교 친구들이 구호 물자 옷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군용 담요와 군복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도 창피했지만, 구호물자 옷보다는 차라리 조금 더 나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배고픔은 밥 한 끼 굶어도 먹은 척하면 남들이 모를 수 있지만 옷에서 묻어나는 가난은 숨기래야 숨길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옷들은 가슴속 한켠에 숨기고 싶었던 가난과 함께 부끄러움까지 속절없이 들추어내었다.
이제 까슬까슬했던 담요 옷은 더 이상 내게 없다. 하지만 매서운 한풍이 불기 시작하면 어머니가 지어주었던 그 옷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