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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인생길, 어디쯤 걷고 있나요    
글쓴이 : 최정옥    25-03-30 14:22    조회 : 1,078
   당신의 인생길, 어디쯤 걷고 있나요.hwp (150.5K) [0] DATE : 2025-03-30 14:22:01

당신의 인생길, 어디쯤 걷고 있나요

                                                                                                                     최정옥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오랜만에 조금은 시원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나른한 휴일 오후, 산악회에서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을 공지한 것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이 산행은 20킬로미터의 험한 등산로를 12시간 이내에 완주할 수 있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빼어난 경관과 험난한 산세에 도전해 보고 싶었지만, 내 산행 실력으로는 시간 내에 완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체력 단련을 결심하고, 광청종주를 시작했다. 광청종주는 수원 광교산의 반딧불이 화장실에서 시작해 서울 청계산의 원터골로 하산하는 24킬로미터 코스였다.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첫 종주 산행은 10시간이나 걸렸다. 설악산 공룡능선뿐만 아니라 더 험한 산행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해 산행 시간을 단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퇴근 후에는 아파트 19층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무거운 발걸음에 엘리베이터 층을 수시로 확인하며,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면 현기증이 났다. 그러나 하루이틀 하다 보니 고통을 견디는 요령이 생겼다. 무거운 발걸음도 예상이 되어 참을 수 있었고, 쏟아지는 땀방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다 보면 결국 집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말에는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루에 다섯 번씩 걸어서 올라갔다. 점점 몸이 가벼워지고, 고통의 시간도 줄어들었다. 단축되는 시간을 체크하면서 점차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광청종주를 시작하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머리에서부터 빗물이 떨어지고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속옷까지 젖은 채로 추위에 떨었지만, 하늘은 마치 나를 시험하듯 비를 멈추고 파란 하늘을 드러냈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젖은 옷은 마르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골짜기 따라 불어오는 찬 바람과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걸었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묻어났지만, 입술의 쓰라림을 참느라 더 큰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추위에 앉지 못하고 서서 보온병의 물을 마시다 보면 저절로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숨이 차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고 소리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봉우리에 올라와 있었고, 편안한 능선길을 걷다 보면 조금 전의 고통은 까맣게 잊혔다. 발걸음이 무겁고 온몸이 땅에 꺼질 것 같아도, 한 발 한 발을 떼어 걷다 보면 언젠가 산행이 끝난다는 것을 아파트 계단 오르기에서 배운 것이다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을 목표로 시작한 광청종주는 내 산행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체력과 자신감이 몰라보게 좋아져, 어떤 종주 산행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혼자 산행하는 용기도 생겼고,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세계의 유명한 산들을 꼭 가보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해가 뜨는 시간에 시작해 해가 지기 전까지 하루 종일 걸었다. 그 시간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고, 점점 광청종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매번 같은 길을 걸으며 나는 그 길을 걸을 때 가장 나답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온 듯 뿌듯하고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어지면, 나는 다시 광청종주를 했다. 무언가를 반드시 해내고 싶은 나와의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폭설이 내린 후, 초록 잎이 무성한 굵은 소나무들이 처참하게 부러지고 터져 있었다. 허연 속살을 드러내며 등산로를 막고 여기저기 눈밭에 쓰러져 있었다. 폭격을 맞은 듯한 그 모습에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막혀버린 등산로를 우회하며 계속 걸었다. 피할 수 없는 재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던 순간들,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참담한 자연재해 속에서도 나는 작은 희망을 찾고 싶었다. 부러진 소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그 틈새에서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광청종주를 하면서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좋았던 날, 힘들었던 날, 아팠던 날, 행복했던 날, 불안했던 날, 설렜던 날. 하루 종일 인생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힘들어서 좋았다. 아니, 힘들수록 더 좋았다. 산행이 힘들어질수록 복잡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대신 더 큰 성취감과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종주 산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추웠다. 온몸이 쪼그라들고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짜릿한 희열을 만끽하며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힘들게 광청종주를 마친 후에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고, 옆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하오고개를 넘으면 국사봉에 이른다. 국사봉을 찍으면 광청종주가 거의 끝난 셈이다. 50대 중반의 나는, 광청종주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화사한 꽃길은 스치듯 지나갔고, 숨 가쁘게 오르막길을 걸으며 죽을 것 같다고 아우성치던 날들도 있었다. 이제 잠시 편안한 능선길을 만난 걸까? 내 인생의 하오고개는 아직 넘지 못한 걸까? 하지만 나는 묵묵히 하오고개를 넘고, 국사봉을 찍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광청종주를 뿌듯하게 완주할 것이다인생길, 광청종주! 설악산 공룡능선의 거친 바위와 날카로운 절벽을 걷는 내 발걸음은 이제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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