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의 언어
제인아
태어날 때부터 머리숱이 풍성하여 소위 머릿발로
미모를 뽐냈던 작은아이는 크는 내내 스윗함과 유니크함으로 나와 남편에게 늘 웃음을 주는 아이였다. 내가 큰아이를 무척 힘들게 낳은 터라 남편은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세상에
혈혈단신이라니, 둘은 돼야 후일 떠나가는 이나 남아
있는 이나 안심이 되지 않겠냐고 설득한 끝에 우리에게 온 아이가 작은아이다. 먹성이 좋아 이유식을 할 때도 힘들게 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모유(어머니만이 해줄 수 있는 선물이자 아기에게는 특권이라 생각했다. 여건이 된다면)를 먹었음에도 젖을 떼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울며불며 떼를 쓰다 돌아누워 잠들어 버리기를 수일간 반복했던 큰아이와는 한 핏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월했다. 젖이 아니어도 먹을 게 널려 있다는 걸 이미 잘 아는 아이였다.
잠들기 전 양옆에 누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노라면 45~6개월 된 큰아이는 원래 책을 좋아하니
그렇다 쳐도 고작 7~8개월짜리 아직 손가락을 빠는 게
일인 갓난쟁이 녀석까지 꼼짝 않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일이 그때나 지금이나 신기하다.
감기약을 먹고 있는 나를 아이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런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며 “이건 엄마가 아파서 먹는 ‘약’이라는 거야. 너는 먹으면 안 돼. 엄마 거야. 알았지?” 아이는 다 안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인 후 다시 제 할 일(종일 노는 게 일이었다)을 했는데 오후에 다시 약을 먹으려고 보니 네다섯 알 정도 되는 약봉지 속 흰색 알들
사이 유일하게 초록색 알약 하나만 없어졌다. 설마 네가 먹었냐고 아이를 다그치자 말없이 내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어디에도 그보다 더 강한 긍정은 있을 수 없었다. 깜짝 놀라 약국에 전화해 위를 보호하기 위한 약이니 아기에게도 괜찮다는 약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엄마가 자기 몰래 혼자만 무얼 먹다 들켰을 테고 흰색보다는 초록색이 더 맛나게 보였으며 하나쯤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딴에는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먹성 좋은 아이의 본능적 도발이었고 나에겐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격이었다. 아이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간과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마시면
안 되겠다 다짐했다.
아이 나이 겨우 두 살 무렵이었다.
무럭무럭 자라 데려다 주지 않아도 유치원에
혼자 갈 수 있을 만큼 의젓해졌다.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주면 엄마가 안 보일 때까지 저도 같이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던 아이였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와 친구들이 몽땅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찾아다니기를 반복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집에 가 보았더니 대여섯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하나같이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현관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냐니 엄마가 누를 때 봤단다. 잠시라도 틈을 주면 무슨 일을 도모할지 모를 아이였다.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을 때도 노파심에 네 자리에서 여섯 자리로 바꾼 비밀번호를
몰래 훔쳐보며 외우기까지 머리를 얼마나 굴렸을까 싶어 어이없고 기도 찼지만 이 또한 잠시 그들만의 은밀함을 공유하고픈 깜찍한 발상이라고 웃어넘겼다.
그해 여름에 서해안으로 여행을 갔다.
장대하게 펼쳐진 염전과 끝없이 이어진 평야가 기나긴 여정의 피로를 가시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일 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더해져야 기억되는 법이다. 그 여행의 기억 한가운데에도 어김없이 변기에 빠져버린 작은아이의 옹종한 엉덩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컵라면을 엎고 또 엎고. ‘암, 그래야 우리 아들이지.’ 애당초 조용히 지나가리라 생각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에겐 그 황당한 해프닝이 그곳에서의
며칠을 추억다운 추억으로, 여행다운 여행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른들에겐 난처하고 피로했던 일이
아이들에겐 뜻밖의 즐거운 일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을 기억하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그런 둘째가 벌써 몇 년째 사춘기를 앓고 있다.
내가 나이를 금방 먹듯 아이들도 금방 자란다.
“엄마 101동인데요. 친구들이랑 아파트 옥상 구경 왔다가 경찰 아저씨 앞에서 반성문 쓰고 있어요. 엄마가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침착하게 말하는 아이와 달리 나는 사색이 되어 달려갔고 퇴근 중이던 남편도 뒤이어
도착했다.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문을
잠갔다는 경비아저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며 혹시 사고로 이어질지 몰라 소방차와 사다리차까지 불렀다는 것이 경찰관들에게 들은 사건의 경위였다. 아이들에겐 큰 잘못인 것처럼 단단히 주의를 주긴 했으나 사실 별일 아니라며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몰래 귀띔해주었다. 놀라고 당황했던 우리 부부를 그렇게라도 안심시켜주어 고마웠다. 반성문을 쓰고 돌아온 아이는 옥상에서 보는 노을이 정말 멋지다며 사진을 찍자고 한
친구를 따라 여러 명이 같이 가게 되었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며 멋쩍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제서야 나는 어두운 저녁이라 모여 있던 사람들이나 경비아저씨가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기에 바빴다. 당시 층간소음으로 괴로움에 시달리던 내가 경비실에 자주 전화를 걸었던 터라 자칫 ‘아이 간수나 잘하지.’ 소리를 듣고도 남을 일 아닌가?
부끄러움은 늘 부모의 몫이고 어른의 몫이다.
중학교 새내기였던 아이에게도 무기한 야간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다.
어느 집에나 암묵적인 서열이라는 게 있다.
우리집 서열 4위인 남편은 반쯤은 체념한 듯 반쯤은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나 강아지나
고양이 따위를 집안에 들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그 자리라도 보전하려 애쓴다. 반려동물이 여전히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작은아이의 반란이 점점 심해지면서 우리집 서열이 뒤죽박죽이다.
작은아이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일이 빈번해지고 그런 아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는 일은 언제나 서열 꼴찌인 남편의 위용이니
서열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큰아이만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집밥도 배달음식도 뻔해 어쩌다 주말 점심 한
끼 정도는 “라면 먹으면 안 될까?” “좋아요.” 하는 큰아이와는 달리 “제대로 된 밥을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핀잔이 돌아온다. 기껏 고생해 밥을 지어 놓아도 제 구미에 당길 때는 “엄마, 라면이 이래 보여도 영양식이에요.” 겸연쩍은 줄도 모르고 기어이 먹고 만다.
‘너도 꼭 너 같은 아들 낳아야 돼.’ 속으로만 하고 만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으레 복통을 호소해 먹지 마라 해도 기필코 먹고는 자주 지각이나 조퇴를 한다. 그럴 때도 “그러게 왜 매운 걸 먹어서, 어디 한두 번이니?” 하기라도 하면 “아픈 아들한테 엄마가 할 소리예요?” 여지없이 쏘아붙이기가 불을 보듯 뻔하다.
“아파서 힘들겠다. 학원도 쉬어야겠네.” 부모에게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자식의 존재 자체임을 공들여 역설해야 한다. 방심하다간 불쏘시개로 되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 속도 말이 아닌지라 아이의 눈까지 마주하기는 쉽지 않다.
시험을 못 봐도 “엄마 인생에 이런 점수는 처음이야.” 하고 싶어도 ”열심히 했으니 괜찮아.” (이럴 땐 표정관리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영혼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노고를 이해하고 격려해 줘야 한다.
간혹 냉정한 큰아이가 옆에서 눈치 없이 “과정보다는 결과지. 모든 건 결과가 말해주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긴 하는데 조바심과는 달리 둘의 언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작은아이는 유독 나에게만 잔인하다.
아이가 내게 요구하는 소통의 방식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정석인 건 맞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양방향이어야지 나만 억울할 일은 아니다.
“귀염둥이 잘 갔다와. 사랑해.” 깍듯이 배웅하고 “더운데 고생했네. 어서 와.” 버선발로 마중해야 하니 하극상이 따로 없다.
이 번거로움 중 한 가지라도 소홀하면 어김없이 무심한 엄마, 대화가 안 되는 엄마, 성적이 우선인 엄마가 되고 남보다 못한 엄마가 된다.
사춘기가 아이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더한 고통으로 온 듯하다.
나의 사춘기를 되돌아보면 어머니와의 불화가 몇 번일 뿐 특별한 기억은 없다. 혹 어머니도
잠시 잠깐씩 내가 미웠을까? 어쩌면 내가 나를 온순했던 딸로만 기억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대체 사춘기의 끝은 어디냐며 답답함을 토로하는
내게 친구는 “4~5년씩 가는 사춘기가 어딨어? 그건 걔가 그런 아이인 거야. 그리고 남자아이가 그 정도면 애교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란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죄송해요.” “감사합니다.”를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단둘이 마트에 가게 되면 엄마 힘들다며 작은 손으로 카트를 손수 끌어주고 물건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상자에 넣어 포장해 주던, “영어학원이 숙제가 많아 힘들긴 한데
그래도 한번 해볼게요.” 말이라도 예쁘게 하던 열한 살 아이의 본성이 돌연 쌀쌀맞아질 리가 없다. 제아무리 까탈스럽고 유별나도 결국 남편과 나의 아이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콩이 팥이 될 리는 없을 거라고. (큰아이는 또 단칼에 “그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있잖아요.” 한다.)
다만 아이와 내가 가진 언어의 온도 차를 줄여 나가는 것이 어른인 나의 과제일 것이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될 180센티미터 키를 목전에 둔 아이가
“엄마, 아까 화내서 죄송해요.”
“이젠 책도 읽고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하며 멋지게 살 거예요.” 할 때는 마냥 끼고 살고 싶다가도 “엄마는 공감능력이 없네요.” 하며 눈에 쌍심지를 켤 때는 당장이라도
등 떠밀어 내보내고 싶은 나의 마음이 순간순간 갈피를 못 잡아 오락가락한다.
“엄마 아빠 일어나세요. 왜 이렇게
잠이 많으세요?”
매일 아침 아이의 어릴 적 목소리가 담긴 알람음을 무한반복으로 들으며 잠에서 깨는 나를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