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창작합평
  트라우마    
글쓴이 : 석정원    26-05-23 11:10    조회 : 80

트라우마

석정원

 

할매요!”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는 분명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쿠웅!”

뒤이어 들린 둔탁한 소리는 낯설었다.

아버지와 나는 후다닥 일어나 소리가 들린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엄마는 피를 토하며 차가운 마당에 쓰러져있었다. 아랫방에 세 들어 살던 할머니도 급히 나왔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엄마한테 소금물을 얼른 먹이라 알려주고, 서둘러 내 손을 잡고 시내에 있는 이모 집으로 향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자정이 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 하나 없는 시커먼 거리를 잰걸음으로 뛰다시피 했다. 차가운 이모 집 철 대문을 고사리손으로 힘차게 두드렸다.

이모이모! 이모야!”

절박함과 애절함을 가득 담아 목청껏 이모를 불렀다.

그날 밤 분명 우리 세 식구는 전설 따라 삼천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하얀 천을 덮어놓은 앞에서 아이고 아이고서글픈 곡을 하는 외할머니와 이모, 그 외 친척들까지 다 있건만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흰 천 안에 엄마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이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죽으면 평생 못 본다는 사실을. 마당에서 무덤덤하게 서서 보고 있던 난 아랫방 할머니네로 쫓겨 들어가야만 했다.

엄마 아버지와 셋이 먹고 자던 안방은 접근 금지구역이 되었고, 남의 방에 들어서니 갑자기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후드득후드득 쏴 쏴작달비 소리는 무서움이 배가 되어 사시나무보다 더 덜덜덜 떨고 서 있기만 했다. 그렇게 난 혼자였다.

먹거나 자거나 한 번이라도 앉은 기억조차 없으며, 오로지 엄습해 오던 무서움만 또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선택적 망각인 걸까? 장례는 3일 장이었겠지만 훨씬 많은 시간이 흐른 느낌이다.

뚫렸던 하늘 구멍이 메꿔졌는지, 며칠 동안 기세등등하던 비가 물러나고, 유난히 눈부시게 깔끔한 햇살이 비추던 날. 갑자기 아랫방 할머니가 주전자를 강제로 쥐여 주며 술 받아오란다. “무서워서 싫어요. 할머니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등을 떠민다.

10살 소녀는 도저히 어른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최대한 빨리 갔다 오리라 마음먹고 등을 돌리는 순간 뒤에서 누가 머리를 확 잡아당긴다. 온몸에 교부가 돋고 머리카락은 쭈뼛쭈뼛, 겁의가 극도인 상태로 구멍가게로 냅다 뛰어 내려가는 순간에도 당겨짐은 심해졌다. 모든 세포가 곤두서도 갔다 오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참고 달리기 신기록을 세우며 집 앞까지 왔을 때, 보고야 말았다. 반대편 길로 내려가는 상여의 뒤꽁무니를.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남독녀인 나에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뜬금없이 술 심부름을 보냈다는 것을.

 

할머니를 불렀지만 적막강산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잠시 후 아기 업은 옆방 아줌마가 방으로 나를 데려갔는데 낯설고 어색했다. 얼마간의 침묵을 깨는 얼레리꼴레리 니네 엄마 영구차에 실려 갔데이시끌벅적한 동네 아이들 놀림 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설움과 꾹 눌려있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올라왔다. 어린 소녀의 눈물은 홍수가 되어 온 천지를 적시고도 남았다. 영구차란 단어를 처음 들었지만, 왠지 어쩌면 엄마를 진짜 못 볼 수도 있겠단 생각에 한참을 더 목 놓아 대성통곡했다. 그 이후 한동안의 기억은 없다. 선택적 망각이 확실한가 보다.

 

훗날 어르신들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비가 온 것은 네 번 만에 겨우 건진 피붙이를 두고 가는 슬픔이요 한의 눈물이며, 무섭게 한 것은 정을 떼려 함이었단다.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절실히 그리운 적이 없었다. 마음 여리고 눈물 많았던 나였지만 어버이날은 희한하게도 감정이 크게 동요되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는다. 엄마 생각이 별로 안 나니 솔직히 살아내기엔 도움이 됐다. 아니면 맨날 보고 싶고 그리워, 눈에 수도꼭지를 달고 살았을 테다. 당연히 힘든 세상 버텨내지 못했을 건 자명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엄마는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입원한 엄마를 보러 간 병원은 특유의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너무 심했다. 그 지독한 냄새가 싫고 거부감이 쌓여 자녀들을 키울 때도 약국부터 먼저 가서 약을 지어 먹였다. 현재까지도 병원 가기가 꺼려져 나의 병을 키우기도 한다. 너무 가기 싫은데 어떡하리 버티다 버티다 간다.

뒤에서 머리를 잡아당긴 건 마지막 길에 하나뿐인 자식 한 번 제대로 보기를 원했던, 갈망의 애처로운 손길이었다고 믿고 싶다. 첫째와 둘째는 태어나 삼칠일 안에 죽었고 셋째는 자궁외임신으로 수술을 해서 세상의 빛도 못 봤다. 넷째가 나였으니 얼마나 귀한 외딸이었을까?

 

이날 이후 텔레비전에서라도 상여나 곡소리가 나오면 얼른 꺼버리거나 채널을 돌렸고, 한동안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상갓집 등이 있으면 대낮에도 빙 돌아서 가야만 했고, 다른 길이 없다면 최대한 먼 거리에서 외면한 채 후딱 지났다.

항상 늦게 잠들던 어느 날 적막을 깨는 흐느낌이 들렸다. 혹시? 설마? 예상대로 1층 주인집 증조할머니가 이생과 이별했다. ‘하 무서운데 어떻게 내려가지걱정이 태산이 되어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에 겨우 대문을 통과해서 도망치듯 출근은 했다. 퇴근은 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조라고 적힌 노란 등을 통과해서 2층 내 집으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하니 시어머니가 받았다. 무서워서 혼자 못 들어가겠다고 하니 뭐가 무섭냐고 타박하면서도 8살이던 큰딸을 보내 주었다. 어린 딸에게 의지하여 걷기는 하지만 마음은 심히 불안정한 상태로 겨우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자세한 사연을 잘 모르니 그냥 눈 크고 순진한 며느리가 겁이 많아서 그렇다 생각했겠지.

 

2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 정 뗀다고 엄마처럼 무섭게 하면 안 돼요. 절대로! 저 그러면 다시는 고향 못 가고 아버지 보러도 못 와요.’ 다행히도 기도가 통했는지 무사히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다.

 

아랫방 할머니는 외할머니보다도 더 친하게 지냈다. 아버지는 자주 늦게 퇴근하니 우리는 아랫방에서 저녁을 먹었다. 먹음새가 좋은 나는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으나 유독 잘 못 먹는 게 있다. 엄마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함께 먹었던 수제비다. 그 날따라 유달리 맛있어서 한 그릇을 비우고 더 달라고 했다가 꾸중을 들었다. 할머니는 더 주려고 하는데 엄마가 극구 말려서 결국은 추가로 먹지는 못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고 서러웠다. 흐르려는 눈물을 겨우 누르는 데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 너무 낯선 엄마의 말과 행동이 이해가 안 됐다.

이 또한 정을 떼려 한 전초전이었음을 당시에는 몰랐다. 숨을 다하는 순간에도 나와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할머니를 불렀으니 말이다.

 

요즘 자주 머릿속을 배회하는 걱정거리 하나 늘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임종이나 염습을 도저히 못 볼 것 같다. 맏며느리라서 책임감과 의무감이 몰려올 때면 주위에 한 번씩 물어본다. “염하는 것 본 적 있나? 어떤 느낌이고?” “염하는 거 직접 봤는데 하나도 안 무섭고 깨끗해서 그냥 자는 모습 같더라하지만 난 글쎄다.

유튜브로 검색해 염하는 모습을 몇 초만 보다가 포기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섭다. 타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엄마 아버지의 죽은 얼굴도 직접 본 적이 없다. 말이 통하는 아들과 두 딸에게 솔직한 마음을 얘기해야겠다.

 

5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거부한다. 인생 반백 년이 지나는 시점부터 조금은 나아졌으나 장례식장을 기피 하려는 경향은 심하다. 일곱 살 때 엄마는 또 병원에 갔는지 없고 빈집에 혼자 있었다. 해거름에 노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웠다. 조용한 가운데 뭔지 모를 미지의 세계,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묘한 느낌, 기분이 참 이상해서 벗어나려 허우적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어둠과 조용함을 싫어하게 된 계기다. 이때부터 밝음과 소리를 택했다. 지금도 외출하고 집에 오면 모든 불을 켜고 텔레비전 소리도 크게 튼다. 잠자리에 들 때 TV는 취침 예약한다. 건강과 수면의 질을 위해 소등하고 누우면 애석하게도 잠이 달아나서 불을 켜 놓은 채 잠들 때도 많다. 불과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별과 양들을 밤마다 자주 세었으나, 숫자를 더할수록 취침과는 멀어지는 환장하는 밤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안 되면 잠잘 때 듣는 음악이나 책 읽기 등을 동원해도 결국은 눈꺼풀이 버틸 수 없을 때 꿈나라로 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아무도 모르게 수십 년을 혼자서 견뎌내야 했던 가슴앓이는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도 내 주위를 맴돌곤 한다.

 

 

 

 

 


 
 

석정원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2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등단 전 합평에 통과한 작품 올리는 방법 웹지기 08-11 11478
공지 ★ 창작합평방 이용 안내 웹지기 02-05 99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