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겨울 작은 딸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딸은 친구들의 결혼 소식을 접할 때마다 본인이 결혼을 하면 엄마와의 여행이 쉽지 않겠다며 갑자기 떠나자고 제안했다. 이곳저곳을 알아본 후 역사, 문화, 자연경관이 매력적인 도시인 나가사키로 결정했다며 간단하게 짐을 챙겨 함께 길을 나섰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서양문화가 가장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던 시기에도 무역이 이루어졌던 유일한 도시라고 하여 1년 내내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라고 한다. 나가사키에 도착하자니 도로나 환경이 매우 깨끗해 보였다. 심지어 도시를 따라 흐르는 강 주변에도 굴러다니는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고 말끔히 정돈되어 있어 성숙한 시민의식을 짐작케 했다. 젊은 딸이 구글을 이용하여 숙소를 쉽게 찾아 우리는 짐을 풀고 관광을 시작했다. 낯선 곳에 왔으니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은 없을 테고 긴장으로 옭아매진 몸과 마음을 살짝 내려놓고 자유의 여인들이 되어 길을 걸었다.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발걸음을 맞춰가며 시내 쪽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부터 가보기로 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원자 폭탄이 투하될 때의 장면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시커먼 연기에 뒤덮여 건물들이 파괴되는 장면들을 연속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한 사람 중 20%가 한국인이어서 우리나라가 제2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말도 있다. 그중 원폭 피해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합천이라는 것을 오래전에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봤다. 강제징용이나 이주 등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현재 합천에는 원폭피해 회관과 위령비도 세워져 있다. 다치고 사망한 조상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떨려온다.
여행 둘째 날은 시내로 나가서 <기모노>라고 불리는 일본 전통 옷을 빌려 입고 공원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싸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이곳까지 온 김에 잠깐 입어보고 벗어버리자고 생각했다. 공원의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구경하는 동안 어색함이 짓눌러대어 보리 추수 후 수염이 내 몸을 찔러 대는 것 같아 몹시 괴롭고 불편했다.
그다음 코스로 일본 3대 야경으로 불리는 이나사야마 전망대로 관광을 나섰다.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물들며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야경을 보기 위해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로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빛을 연출하는 다리가 있어 그곳을 건널 때는 천장에서 물결치는 빛의 향연에 흠뻑 빠지게 되고 저 멀리 항구들과 시내는 보석을 깔아놓은 것처럼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어 온천지가 빛으로 물든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양 볼을 때린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딸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병원에 근무를 나가고 나면 스스로 공부하고 밥까지 챙겨 먹어야 했던 게 힘들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걸 듣고 있는 나는 가슴속에 뭉친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편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학생이 우리 옆으로 와서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았다. 본인은 충무에서 혼자 여행 왔다며 내 목소리가 본인 엄마와 똑같아서 순간 자기 엄마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별사람 다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한국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학생은 어머니가 약 6개월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며 그 후 도저히 마음을 잡지 못해 학교도 휴학하고 혼자서 여행을 한다고 했다. 엄마와 이별 후 친구들이 어머니 이야기하는 자리에는 고통스러워서 함께 하지 못하겠고, 그리고 어머니 없이 치르는 본인의 결혼식은 상상도 하기 싫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하소연을 했다. 한참을 듣고 있다가 나는 “그래도 용기내서 살아야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행복해 하시지 않겠느냐?” 라는 아주 단편적인 격려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다. 헤어져 오는 길에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에게 세상을 만들어준 큰 존재가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제부터 너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되지 않겠니?’ 라며 그 학생의 앞날에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빌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작은딸의 눈에서는 감추지 못한 눈물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셔틀 버스를 타고 이오지마 관광에 나섰다. 여러 팀이 타고 가는 증에 기사님께서 한국말로 이오지마에 대해 소개해 주셨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읽어보라고 했다.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와는 남쪽으로 멀리 동떨어져 있으며 유황냄새가 많이 나는 활화산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모녀는 이오지마에서 유명한 시마카제노유 온천에 갔다. 이 온천은 지붕은 있으나 벽이 없어 노천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산과 바다가 보이는 천연온천으로 관광객들이 잘 모르는지 굉장히 한적한 곳이었다. 몸은 물속에 담그고 두 팔로 얼굴을 괴어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살아오면서 쌓인 온갖 시름도 꾸역꾸역 말아서 턱밑에 함께 밀어 넣고 말이다. 나의 시야에 들어온 낚시꾼 두 명이 고기를 잡느라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다.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의 우리가 보이지 않겠지 하며 무념무상에 잠겨본다.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들은 새털구름을 융단삼아 한가로이 노닐며 외로운 이오지마를 지키고 있다. 그 순간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서너 명 깔깔 대며 온천탕에 들어오는 바람에 꿈같은 고요는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온천을 마치고 나오니 배가 출출해져 음식집에 들렀다. 일본어가 안 되는 딸은 굶을까봐 조마조마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나의 짧은 일어실력으로 짬뽕을 달라고 대충 말했으나 주인께서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고는 음식을 가져와 무사히 먹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제 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고 또 휴대폰에 앱을 깔아 가뭄에 콩 나듯이 일어회화 연습을 해왔으나 막상 말하려고 하면 입술에 꿀이 붙은 것처럼 떼기가 무척 힘들기는 하다. 그러나 식당에서 주문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딸은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섬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관광을 마친 후 셔틀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를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저 멀리서 걷고 있는 젊은 여성 한사람이 보이기에 달려가 “잠시만요” 하며 불러 세웠다. “아노 음 스미마쌩 음 빠스노리바와 도코데스까?” 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니 그 일본인이 냉큼 한국말을 해대는 바람에 무척 놀랐다. 어머나! 하고 움찔하고 있는데 본인은 일본인이며 케이 음악 케이 드라마를 너무 사랑하여 서울에 가서 삼 년 정도 살다가 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우리나라의 높아진 문화 예술의 위상에 자긍심이 생겨나고, 이 여성의 용기에 한 번 더 놀라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빌려서 읽어보았다.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는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혈투가 벌어져 희생과 고통의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전투 당시의 불발탄이 아직 섬 곳곳에 남아있어 발을 잘못디디면 터질 수도 있다는 위험한 섬이라고 한다.
전쟁이 훑고 간 대지 위에는 색색의 꽃과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초겨울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그곳을 여행했던 나는 아픔을 간직한 곳이라는 것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딸과 함께 걸으며 보았던 이오지마 푸른 바다를 가끔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냄새가 나는 것 같다. 딸아! 다음에 또 함께 아름다운 곳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