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
강 덕수
3대가 함께 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오륙십 년 전에도 대가족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21세기 아파트에서 3대가 사는 게 얼마나 불편했을까! 선택할 수 있다면 3대가 한 집에 사는 일은 별로 없을 거다. 더구나 공간을 공유하는 아파트에서라면. 우리의 경우도 3대가 함께 살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장모님이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않으셨으면, 장모님의 간곡한 말씀이 없었더라면,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오순도순 사셨더라면 우리가 좁은 아파트에 들어가 살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2년을 장모님과 한 아파트에서 그럭저럭 지냈다. 장모님은 어린 손녀 재롱에 근심을 잊으시고 평정심을 찾으셨다. 얼굴엔 웃음기가 찾아와 집안에 훈기도 돌기 시작했다. 장인어른도 마음 놓고 바깥 생활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장인어른은 디스크 수술을 받고 직장 생활을 접으셨다. 그때가 60대 초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데 장인어른은 우리와 함께 살게 되면서 쉬고 싶으셨던 거 같았다. 대신 고정 스케줄을 하나 만드셨다.
금요일 오후면 친구분들과 여행을 떠나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셨다. 어디로 누구와 가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주중 4일을 충실히 집안일을 도와주시고 주말 3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나가셨다. 전 같으면 장모님이 허락할 리 없었지만, 우리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손녀 재롱에 장인어른의 들고나심에 관심이 없어졌다.
애가 조금 크면서 근처 아파트로 독립했다. 잠자리만 독립이었지 생활은 한집 살림이었다. 그때는 둘째가 생겨 우리도 장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침엔 아기를 장모님에게 맡기고 저녁엔 처가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큰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 집으로 가는 게 일상이었다. 사실 처가살이라기보다는 처가와 공생 관계였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10 년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우린 강남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용인으로 이사를 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 그래도 애들은 계속 같은 학교에 다니고 저녁엔 모두 할머니댁에 모여 밤늦게 같이 귀가하는 생활을 했다. 또 시간이 지나 큰딸은 대학을 가고 작은딸은 용인 동네 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주말 아니면 할머니를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사이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장모님은 무섭다고 장인어른이 바깥에 나가는 걸 못 견뎌 하였다. 그때 우린 용인에서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 장모님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장인어른이 오셨다. 그리고 툭 한 마디 하셨다.
“어느 방을 쓰면 되겠어?”
“안방 비었어요. 거기 쓰세요.“
망서림 없이 말씀드렸다. 집사람과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사오신 바로 다음 날 생겼다.
안방 바로 앞에 약간 작은 방이 있었는데 우리가 그 방을 썼다. 방에서 우리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는데 내 목소리가 좀 컸던 거 같았다. 갑자기 장모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 서방, 그러면 난 이 집에서 못 살아!“
순간 당황했다. 목소리가 커서 싸움을 하는 줄로 오해하신 거였다. ‘아, 바로 이거구나!’ 퍼뜩 깨달았다. 장모님이 안심하도록 잘 말씀드렸다. 3대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선 2인자의 자리를 지키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장인어른은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집에만 들어오시면 텔레비전을 트시고 그 앞에 앉으신다. 주무시면서도 텔레비전을 켜놓았다. 드라마나 음악방송보다 바둑, 아니면 권투 같은 격투기 프로그램을 주로 보셨다. 2인자의 위치는 텔레비전 채널권을 넘보지 않는 거다. 월드컵 축구 정도 아니면 텔레비전 앞에 앉을 생각도 안 했다.
장인어른은 미식가였다. 오래전부터 집에 와서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를 해 주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둘째가 태어날 무렵부터였으니 함께 한 세월이 제법 오래 되었다. 그분은 음식 솜씨가 참 좋았다. 그래도 하루의 식단은 장인어른이 정하였다. 식재료 장보기도 장인어른 몫이었다. 집사람의 일은 한달치 생활비를 드리는 걸로 끝났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빈자리를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오늘 저녁 뭘 먹지?’였다. 장인어른이 즐겨 하셨던 메뉴 중 하나가 ‘스키야끼’였다. 장인어른은 단 것을 좋아하셨다. 스키야끼에 설탕을 많이 넣고 각자의 그릇에는 날달걀을 넣는 것이었다. 우린 늘 그렇게 먹었다. 장인어른 돌아가시고 난 다음 우리가 스키야끼를 먹는 날은 장인어른 돌아가신 기일이다. 대신 설탕을 넣지 않고 날달걀도 넣지 않은 야채와 고기만 들어간 스키야끼를 먹는다.
3대가 같이 살다 보면 불편할 것 같지만 사실은 편했다. 아이들이 밥상에서 할아버지보다 먼저 숟가락을 드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걸 우린 가르치지 않았다. 2인자였던 내가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기다렸을 뿐이다. 얼마 전 결혼한 큰딸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왔다. 여덟 살짜리 손자는 세 살짜리 여동생이 숟가락을 먼저 잡는 걸 보고 말렸다. 그리고 점잖게 훈수를 두었다. ‘할아버지 드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
딸애들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딸애들이 외출할 때나 외출에서 돌아올 때는 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 방에 들러 먼저 인사를 드렸다. 엄마가 늘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식탁에서 투정하는 걸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짜신 메뉴는 식구들을 위한 최선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인어른을 뒤따라 6년 뒤 장모님도 오랜 세월의 투병 생활을 끝냈다. 그로써 우리의 3대 생활도 마감했다. 우주가 텅 빈 듯한 공허를 느꼈다. 2인자로 살 때가 정말 좋았다는 걸 순간 깨달았다. 그동안은 애들에게 야단칠 일이 없었다. 집사람과 큰소리 낼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