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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의 좀 해도 되나요?    
글쓴이 : 백승희    26-02-12 19:32    조회 : 2

                                       

                                        건의 좀해도 되나요?

 

                                                                                            백승희

 

[2025710일 목요일, 찌뿌둥]

근무가 없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참 나쁘다.

둘째 딸이 다니는 중학교의 학부모 회의는 항상 내가 쉬는 날인 목요일 아침에 열린다. 감사는 하다. 딸아이가 반장이라 도의상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반 대표 자리라 다른 건 못하지만 1년에 4번 있는 학부모 회의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아까운 연차를 쓰지 않고도 이렇게 할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그녀의 활약은 눈부셨다.

“2학년 복도 화장실 옆에 사용 안 하는 빈 공간이 있던데, 가리개로 가려 놓고 못 들어가게 해놨던데요. 그런다고 애들이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고의 위험이 있어 보이던데. 차라리 그 공간을 오픈을 하고 활용을 하면 어떨까요?”

지난주 제가 급식 모니터링을 할 때 밖이긴 하지만 주방 출입문 근처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했고 학교 측에 정확한 사건 파악과 조치에 대해 건의 드렸는데, 어떻게 되었나요?”

다음 주 수요일에 용인시장과의 간담회가 있는데, 저는 후문 대각선 횡단보도 설치와 학교 앞 보행로 확장, 번 버스 배차 조정, 학교 뒷길 CCTV 확충, 육교 보수, 학교 인근 정치 현수막 제한을 학부모 회장님께 건의 드렸습니다. 다시 없을 기회니까 그동안 건의할 게 있었던 분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꼭 건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사소한 건 학교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큰 건들은 일개 학부모가 건의 좀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2025714일 월요일, 후끈후끈]

늦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내리 달려 죽전 사거리 교차로에 단숨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빨간불에 걸려 서 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한꺼번에 우르르 긴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딱 한 사람이 길을 다 건너지 못하고 죽전 고가 차도 밑 횡단보도 중간에 갇혔다.

왼쪽 겨드랑이에 낀 지팡이에 온몸을 지탱한 채 늘어진 오른쪽 다리를 몸의 반동으로 끌어 붙이고 있는 70대의 노신사 한 분이 흔들리며 거기에 서 계셨다.

이번 지하철을 놓치면 안 되는 나는 죽전역까지 뛰어가면서 자꾸만 자꾸만 그를 돌아보았다.

 

[2025911일 목요일, 한들한들]

이번 학부모 회의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학부모 회장이 쏘는 거라며 샌드위치랑 커피가 돌려졌고, 항상 미간에 힘을 주고 있던 그녀의 얼굴도 한껏 풀어져 무방비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2학년 층에 방치되어 있던 공간은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공유 전시 공간이 되었고, 7월에 있었던 용인시장과의 간담회에서는 우리 중학교에서 가장 많은 안건을 제시했고 또 가장 많은 제안이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후문 쪽 학생들의 무단횡단이 만연했던 횡단보도가 대각선으로 변경될 예정이고 보행자가 드문 학교 뒷길에 CCTV가 더 설치될 것이며 육교의 부서진 계단은 신속히 수리되었다.

되는구나!’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녀가 점점 크게 보이며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녀의 사소한 관심과 깐깐함에 여러 사람이 안전해졌다. 애정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용기가 없으면 작은 것 하나도 바꿀 수가 없다.

 

[2025915일 월요일, 추적추적]

오늘따라 파란불은 왜 이렇게 안 켜지는 거야! ’

신호대기선에 바짝 붙어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몇몇은 빨간불인데도 횡단보도 중간까지 먼저 이동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차량들은 신호의 꼬리를 억지로 물고 앞차에 들러붙으러 과감한 좌회전을 해댔다.

수인분당선 죽전역과 고속도로가 인접해 있는 죽전 사거리 교차로는 출퇴근 때마다 위법과 위험 천지다.

 

[2025917일 수요일, 우중충]

그 노신사다! 그동안 어디 아프셨나, 핼쑥해지신 것도 같네

오늘도 그는 혼자 횡단보도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한다. 마음에 돌덩어리 하나가 내려앉았지만 죽전역으로 가는 내 발길을 돌리진 못했다.

그때! 내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 “ ~~! ! ”

일순 온몸이 굳었다. 불길한 마음에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겨우겨우 고갤 돌려 바라본 그곳에그가 그대로 서 있었다.

충돌한 차량 두 대가 보이고 금세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2025918일 목요일, 울긋불긋]

저기, 용인 시민인데요. 건의 좀해도 되나요?”

 

[2026119일 월요일, 포근포근 ]

만원 지하철에 마지막 탑승자로 탔다. 핸드폰도 볼 수 없게 끼여 천천히 출발하는 차를 느끼며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역사 벤치에 앉아 있다. 순간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반가운 눈인사를 보냈다. 그가 미소로 답해 주었다.

 

지금 죽전사거리 교차로엔 양방향으로 교통섬이 생겼다. 교통섬엔 신호등도 하나 더 생겼다. 보행자들이 좀 더 안전하게 되었다.

나 때문은 절대 아니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시에서는 이미 공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다만! 나는, 나만 생각하던 내가 남을 조금이나마 생각할 줄 알게 된 게 기쁘다.

태어나 처음으로 시청 민원실에 전화한 내 떨렸던 작은 용기가 혼자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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