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이정원
나는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나와서 정부 기관이 주관하는 곳에
강의하는 5년 차 강사이며 때마다 그룹전에 참여하는 작가였다. 흔히
보따리 장사라고 말하지만 30대 초반이었고 앞으로 더 안정될 거라는 믿음으로 내 경력을 쌓고 있었다.
남편은 그때 오랜 박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의 진로로 박사후과정(post-doctor)을 국내뿐 아니라 국외로도 알아보고 있었다. 여러 곳에 인터뷰한 후 우리의 사정을 고려하여
일본에 있는 연구소에 가기로 했다. 떠나는 시기가 2011년8월이었는데 그해 3월에 일본을 덮친 쓰나미로 인해서 주변에서는 걱정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두 아이와 이민 가방 4개를
짊어지고 일본으로 향했다. 나의 경력 단절은 그때부터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질 줄 몰랐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한 해외 생활은 낯선 언어와 익숙하지 않은 환경으로,
가족 모두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게 했다. 아이들과 나와 남편은 누구 할 거 없이
고군분투하며,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불안 증상들을 느꼈다. 일본에
온 지 6개월 만에 친정엄마가 놀란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을 돌봐주기 위해서 일본에 왔다. 두 달 동안 엄마의 보살핌에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 힘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이제
살만하다고 느낄 때 일본 연구소에서의 1년 6개월 생활을 마치고, 남편은 또다시 미국 아이오와의 대학으로 박사후과정을 가게 되었다.
1년 6개월이라는 해외 생활이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심리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거 같다.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나름대로 경험을 통해 미국은 일본보다 적응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수월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자포자기였고 얼떨떨하기만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이오와주 에임스라는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은 광활한 옥수수 밭이었고 고층 건물이라고는 아파트 3층이 제일 높은,
광야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선 외로움이 무엇인지 몸소 깨닫는 시간이었다.
드넓은 아이오와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남편은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옮기기를 원했고 워싱턴주에 있는 국립연구소에서 오퍼를 받아, 또다시 이삿짐을 싸야 했다. 이쯤 되니 나그네의 삶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30대 중반이었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이었지만, 마지막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임스보다는 조금 큰 소도시인 워싱턴주의 리치랜드라는 곳에 도착했다. 한국산과는 다른 민둥산이 도시에 있었고, 8월 말에 도착하였는데 모래바람이 불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긴장되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다행히 연구소 환경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든 기회가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고향을 떠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젊었다.
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을 3년 한 후 남편은 스텝이 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박사후과정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총 6년의 세월이었다. 남편은 한국에 돌아갈
마음을 접은 듯이 보였다. 난 내 나이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기회가 되면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문은 좁았고 남편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선택보다는 아이들과 남편의 선택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난지 십 년 만에 나도 이곳에서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 시간 사회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았다. 그 시간만큼 사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시작해야 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를 넘고 넘어야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십 년이 넘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공동체에 섞이기 위해, 나를 위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도 쉽게 잡혀 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이방인인데 잠깐 방문하는
한국에서도 온전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비워진 긴 시간의 공간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이곳에 있으면
한국에 가고 싶고 한국에 가면 내 집이 있는 이곳으로 오고 싶고 참으로 사람이 우습고 간사하다.
한국 마트도 한국 물건도 파는 곳이 없지만 난 여전히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책을 읽는다. 나의 관심은 살아가고 있는 이곳보다 떠나온 한국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 타향살이하는 동안 나의 고향 대한민국을 평생 그리워할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으로서,
비록 뿌리는 없지만, 여전히 눈총을 받지만, 이곳에 조금이나마 동화되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 내 뿌리를 향한 그리움을 가지고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의 마지막은 언젠가는 타향살이를 마무리하고 나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