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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눈이 어두운 덕분에    
글쓴이 : 김희정    26-05-17 17:41    조회 : 18

                                                 길눈이 어두운 덕분에

10년이 넘게 같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여기저기 손 볼 곳이 자꾸 눈에 띈다. 어느 날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화장실의 장식장과 거울을 교체하고 싶다고 했더니, 친구는 일산에 있는 조립 가구 전시장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일산까지 가자고? 나 강서구 면허인데?”라고 했더니, 친구는 그런 면허도 있냐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면허를 소지한 지는 20년쯤 되었고 자동차를 운전한 지는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내가 사는 곳인 강서구를 벗어나 운전을 해본 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늘 다녀 익숙한 곳에서의 운전은 어려움이 없지만 길눈이 워낙 어두운 탓에 낯선 길을 갈 때면 그 긴장감이 나를 편치 않게 한다. 그러나 쌍둥이를 출산한 이후에는 차가 없이는 아이들과의 외출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운전을 시작했다.

자동차를 사기로 결정하던 날, 남편은 어떤 차를 갖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어 그냥 잘 굴러가고 가다가 서지만 않으면 아무 차라도 상관없어.”라고 말했다. 며칠 후 우리 집에 오게 된 나의 첫 차는 연분홍색 경차였다. 남편은 자동차의 뒷유리에 남매가 그려진 어린이 보호 차량이라는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누가 봐도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아줌마 차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그런 차였다. 물론 운전해서 주로 가는 곳은 마트와 백화점 그리고 문화센터가 전부이다.

어느 해 봄학기부터 영어도서관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출발 전에 미리 내비게이션으로 모의 주행을 해보았더니, 소요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였고 가는 길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은 교통상황을 고려해 가장 빠른 경로를 탐색해서인지 시장길을 경유해 언덕을 올라가도록 안내했다. 좁은 시장 골목을 통과해 올라가는 동안 식은땀이 날 정도로 잔뜩 긴장했다. 일단 도서관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부터 집에 가는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은 후,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는데 반대편에서 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내 차가 먼저 진입했고 그쪽에서도 차가 내려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텐데, 한 대의 차밖에 지나갈 수 없는 좁은 시장길을 어쩌자고 올라오는 건지 정말 이해 불가였다. 나더러 언덕길을 후진해서 올라가라는 건가? 나는 마치 얼음처럼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험상궂게 생긴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왔다. 공포가 엄습했지만 시장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이 운전자가 보여준 태도로 보아 절대 상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내 차로 다가온 그 운전자는운전 못해?”라며 다짜고짜 반말을 했고, 나는 .”라는 답만 하고 그 사람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운전자는 어디 가서 뺨을 맞고 와서 나한테 화풀이하려다가 김이 샌 눈치였다. 전투력을 상실한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차로 돌아가더니 얌전히 후진을 했다. 늘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당한 억울한 일은 내 차가 경차에다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아줌마 차여서 그런 거라며 남편에게 괜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남편은 갔던 길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올 때는 다른 길로 왔어야지 라며 뻔한 조언을 했고, 길눈이 어두운 나를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이 상황에서 할 적절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외출할 때는 환승역과 내리는 역 그리고 출구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후 출발한다. 그러나 출구에서 나와 목적지까지 찾아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는 하다. 내가 익숙지 않은 곳을 갈 때면, 남편은 혹시나 내가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지도를 그려서 설명해 주곤 한다. 나에게 지도는 그저 그림일 뿐, 그러나 남편의 성의가 고마워서 말로는 알았어.”라고 하고 속으로는 괜히 헤매는 것 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를걸?’하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박물관, 소극장, 전시회 등을 갈 때면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하철 출구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그런 내가 영 미덥지 않았었나 보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한 후, 아이들에게 오늘 지하철 타고 ㅇㅇ공연 보러 갈까?” 하면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아빠 있을 때 아빠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며 내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듯 완곡하게 거절한다. 아이들은 모르나보다.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곳에 갈 때, 가기 전에 주변 지리를 얼마나 열심히 익혀두는지를.

 

딸과 외출했을 때 일이다.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가려다가 눈에 띄는 굿즈 샵과 팝업 스토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모처럼 딸과의 데이트가 즐거워서였을까? 구경하는 곳에만 온통 시선을 뺏겨, 왔던 길을 눈에 담아 두지 않은 채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가려면 정확히 내가 왔던 길로 다시 가야 하는 습관이 있는데 주변을 살피고 걷지 않은 까닭에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한참을 걷다가 더 이상 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딸을 멈춰 세웠다.

이 길이 아닌 거 같아.” 딸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엄마, 그냥 계속 걷다 보면 길이 나오지 않겠어요?”라며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길에 관해서는 내가 전혀 믿음직한 엄마가 아닌데 무얼 믿고 이렇게 느긋한지 의문이다. 그래, 너랑 나랑은 길에 관한 한 실랑이를 할 필요조차 없구나! 마치 낯선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 듯한 말을 하는 딸. 우리는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낯선 곳을 헤매는 일에 피곤함을 느껴 결국엔 편리한 택시 앱을 이용해 집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아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역시 길눈 어두운 우리 엄마.”라며 나를 놀리느라 바쁘다. 그래도 어느새 많이 자라서 여행 중 함께 걷다가, 내가 한눈을 파느라 걸음이 늦어지면 잘 따라오는지 뒤돌아 확인하며 나를 기다려준다. 나의 서툴고 부족한 부분을 수용해서일까. 사람들의 말에 내 마음이 뾰족해지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니 내 곁에는 이런 나를 마중 나와주고 데려다주고 잘 도착했는지 물어봐 주는 이들이 늘 있었다. 그 마음엔 배려와 너그러움과 인내가 있었겠지...

 

며칠 전 친구와의 만남 후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함께 내려가는데,

친구는 건물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도 되는데 왜 굳이 더운데 밖으로 나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거야?”라고 묻는다.

... 내가 여기 올 때 이 길로 왔거든. 그러니 갈 때도 꼭 이 길로 가야 해.”

친구는 귀여운 어이없음이라며 웃었고 우리는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친구를 위해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더니 친구는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고 가라며 한사코 거절한다. 그렇게 나를 보내고 친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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