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사랑
전혜숙
나의 첫사랑은 일곱 살 때였다.
우리 집 바로 아래 솟을대문 안에 살던 소년은 여느 시골 아이처럼 얼굴이 검게 그을리지도 않고 늘 준수하고 반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위엄 있어 보였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노란 줄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아버지는 흰 셔츠를 입고 면사무소에 다녔는데, 가족들 모두가 시골의 힘든 노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소년은 우리 또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였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내 단짝 친구는 그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자지러지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마음은 애닳았지만, 겉으로는 크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가끔 잘난 체하는 모습이 싫을 때도 있었지만 크게 싫지는 않았다.
그가 반장을 도맡아 했던 터라 부반장이 누가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욕심 많은 나는 한 번도 부반장을 뺏기지는 않았다.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승자라고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1학년 미술 시간에 선생님께서 그림 네다섯 점을 골라 벽에 세워 놓고는 반장인 그에게 제일 잘한 작품을 하나 뽑으라고 했다. 누가 봐도 미술반인 내가 제일 잘 그렸는데, 그는 그림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애간장을 녹였다. 끝내 안 뽑아줄 것처럼 고심을 하더니 결국 어렵게 나를 뽑았다. 얼마나 부아가 나고 가슴이 떨리던지 1등이 되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긴 하였다.
고향에서 이사 나온 후 오빠들과의 친분으로 5학년 때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사춘기가 막 시작된 때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다. 그대로 가슴 한편에 아쉬움으로 남는가 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넘어 고향 친지의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그 만남은 아니 만났어야 좋을 뻔했다. 예전의 그 준수함과 총명함은 어디로 가고
나의 기대와 크게 달라진 모습에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순전한 사랑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난 채 끝나고 말았다.
결혼 전까지 몇 번의 소개팅이 있었지만 누굴 내놓고 좋아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딱 한 번 여름 소나기가 내릴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뉴밀레니엄과 함께 이십 대의 끝이 되자 결혼 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되어 대학생들 틈에 끼어 유럽 배낭여행에 다녀오게 되었다. 3주간 큰 배낭 2개를 앞뒤로 둘러 매고 같이 먹고 자면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니 없던 자신감이 충만했다.
갑자기 언어에 대한 도전 의식이 생겨 재미교포 청년이 이끄는 교회 영어 동아리에 들어갔다. 당시 서울에 있는 명문대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영어가 매우 유창하고 착하기도 해서 인기가 많았다. 방학을 맞아 모교 교수님을 도우러 학교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그는 나보다 2살 연하였지만 무척 어른스러웠다. 그와 교포 청년 그리고 여자 청년들 몇몇은 동아리 모임이 끝나면 근처 대학교 중문에 가서 햄버거도 먹고 차도 마시 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골 출신에 고향이 같았다. 그로 인해 충주댐 수몰로 실향의 아픔이 있던 내가 오랜만에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니 나를 편한 누나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손등에 심한 흉터가 있었는데 어렸을 적 소 꼴을 베다가 낫에 다쳤다고 하였다. 오빠들이 시골에서 소 꼴 베고 소몰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나 보다 어린 그가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는 외로운 고학생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학원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고, 학교 조교와 영어도 어렵게 독학했다고 하였다. 방학 때도 모교 연구실에서 기거하면서 교수님 심부름이나 연구를 돕는 것 같았다. 늘 웃고 있었지만, 많이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외로운 사람이 더 외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그는 누구보다 성공에 대한 갈망이 컸다. 유학을 다녀와서는 모교가 아닌 서울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싶다고 속내를 비쳤다. 나의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IMF가 터지면서 학교 기간제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정교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특히 남동생이 없는 내게 다정하게 ‘누나’라고 불러줄 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색다른 감정을 갖게 하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외로움이나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실 그와 나 사이에 큰 벽이 있었으니, 그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같은 과 후배인데 해외 어학연수 중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골기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겠는가? 용기 있는 자가 미남을 얻는다고 하지 않던가?
교포 청년과 우리 셋은 가끔 어울려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차가 있다면 멀리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고차를 막 장만한 여동생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면서 어렵게 차를 빌리기도 하였다. 그의 누나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기도 하고, 고향 주변을 여행 하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 된 듯했다. 그때 공교롭게 한 쪽 다리를 다쳐서 반깁스 했었는데, 그와 나를 도와준다고 의도치 않은 스킨십을 하게 되면서 가까워지게 된 것도 같다.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방학이라 시간도 많았고 서로 밤늦게까지 일이 있어 자주 통화를 하면서 가까워졌다. 종교가 같아 마음도 편하고 여러 취향이 같아 잘 통했다. 그의 모교가 집 근처라 평소에도 자주 가곤 했는데 도서관에 있던 어느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나, 지금 어디야?”
“여기 도서관인데”
“그래? 내가 지금 차를 잠깐 쓸 수 있어. 잠깐 드라이브 갈까?”
“드라이브 좋지!”
장마철이라 하늘은 금방이라도 한바탕 비를 퍼부을 듯 회색의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는 대청댐 쪽으로 차를 몰았다. 예상대로 와이퍼가 소용이 없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쏟아부었고 습한 기운이 차 안까지 들어찼다. 오직 들리는 소리는 세찬 빗소리와 와이퍼가 힘겹게 끽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퍼붓는 비로 앞은 잘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순간 차 안은 적막감이 들면서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동안 편한 동생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만큼은 남자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도 어색함이 한동안 계속되자 가까운 휴게소로 차를 급히 돌려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산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팔각정으로 내 달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 앉아 있었다.
모두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모두 우리를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더욱 쑥스러웠다.
둘만의 만남은 처음이었기에 그 일 이후 그를 많이 좋아하는 걸 확인하자 마음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저 지나가는 인연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 의미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 그가 해외 연수 인솔 일정이 생겨 일주일 정도 시간이 생겼다. 20대 후반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그와의 만남을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당시 나는 학교 기간제 교사의 신분으로 직장이 불안정하고, 그는 명문대생으로 성실히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을 다녀오면 언젠가는 교수로 임용이 될 것이다. 그에겐 나보다는 자신과 함께 성장해 나갈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좋아도 그와 짝이 될 수 없으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아쉽지만 정이 더 들기 전에 나이 든 내가 이성적으로 결단을 해야 했다.
일주일 후에 모임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와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원래의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고 싶었던 마음은 접어둔 채 냉정하고 의례적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 감정의 여지가 남을 것 같았다. 정에 약한 내가 어떻게 그토록 냉정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도 갑자기 변한 나의 태도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서로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이 가버렸다. 그도 나도 방학이 끝나자 각자의 학교로 돌아갔다. 하지만 감정의 바람개비는 그리 빨리 멈춰지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 마련이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을 만나 한참 연애 중이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를 우연히 만났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였고 나는 그에게 결혼할 사람이라고 남편을 소개하였다. 그가 깜짝 놀랐다. 마음속으로 좋은 사람 만나서 꼭 성공하길 바랐다.
나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상하게 그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았다. 얼마 전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는 모교에 교수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의 선함이 얼굴에 보였다. 마침, 아는 교수님의 남편이 그와 같은 과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그에 대해 슬쩍 물어보니 놀라워 한다. 어떻게 아느냐고 해서 청년 때 교회에서 잠깐 알았던 분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서울에 살고 있고 주말에만 올라간다고 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싶을 때 만난 사람과 하게 된다. 어느 여름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사랑의 감정과 청춘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던 고마운 사람임은 틀림없다.
내 젊은 날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