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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손님    
글쓴이 : 박승해    26-11-04 00:46    조회 : 190

봄 손님


  아무 눈치도 못챘다. 겨울이 떨구어낸 이파리가 귀퉁이에 눈 감고 누워있다. 상처투성이 몸둥이 밑 새싹이 옹알이 하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어느날 꽃잎이 두 팔 휘저어 겨울을 치우기까지. 나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걸 알지 못했다.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지 않아도 꽃들이 작은 소리를 조랑거리며 바짝이고 있다.

 

  아지랑이 살그머니 피어오르는 물가에 단단히 자리 잡은 연연한 버드나무의 연두빛에 마음이 살짝 기운다. 언덕에 한 무더기로 자리잡은 산수유, 어느새 나는 그 부드럽고 은은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자연에의 경외심에 고개 숙인다. 배냇 저고리 같은 뽀얀 숨을 쉬는 노란빛은 자연의 순수를 알려준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하품하는 아가의 입술 같은 산수유물결을 온 산에서 지천으로 볼 수 있다.

  숨을 참고 조금만 귀 기울이면 들린다. 영혼이 쉬는 초록 안에 생명의 꼬물거림이 소란하다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초연한 아름다움이 있다. 봄은 승리의 여신 니케를 떠올리게 한다. 냉냉한 겨울을 이기고 얼음 알갱이 묻은 새벽을 열고 강인하게 솟아난다. 긴 겨울을 마른 나뭇가지 안에서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던 생명이 고독의 허물을 벗고 날개를 열어 솟아난다.
고통을 이겨낸 생명. 꽃의 화려함을 지탱하는 건 살얼음 속 드러내지 않은 겸손과 고개숙인 인내가 아닐까?

 

  겨울이 자리를 틀어쥐고 있는 2월에 피는 매화는 흰 서리를 녹여 망울을 터트린 여인의 인내와 고결함을 보여준다. 흰색과 분홍색, 붉은색의 매화는 서로 다른 품격를 품고 각자의 신념을 전달한다. 매화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피는 홍매화는 차돌같은 강인함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겨울이 코웃음 쳐도 개의치 않는다.
  옛 문인의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의 으뜸이 매화 아니던가. 게다가 여름이 되면 매실 열매로 얼마나 우리를 기쁘게 하는가. 매실청은 다음 해까지 달콤한 매실차로, 설탕을 대신하는 양념으로, 또는 매실장아찌로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복사꽃은 매화처럼 고고한 기품과는 다른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原記)에서 복숭아꽃 만발한 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말한 건 백번이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릴 적 흥얼거리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의 복숭아꽃이 바로 이 복사꽃이다.

  연분홍 복사꽃은 매력적인 사랑, 행복, 행운과 번영을 상징한다고 하니,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이 나무 아래서 ‘도원결의’를 다진 건 당연하다.

 

   동백나무는 어떤가. 든든하고 커다란 짙은 녹색의 단단한 나무는 크기가 어른의 키를 훌쩍 넘어 15m까지 자란다고 한다. 무엇이든 다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나무이지만 꽃이 떨어지는 모습은 섬뜻한 잔인함이 있다. 노란색 꽃술을 온몸으로 감싸 안아 보호하는 여인의 빨간 치마폭 같은 동백꽃은 왜 이리도 잔인하게 뚝뚝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스스로 기구한 세상에 몸을 던져 저항하는 걸까?

  어느 때인가 나는 나무 아래 수북하게 떨어진 붉은 동백꽃을 보고 그 처연함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만 적이 있다. 꽃의 죽음을 보고 관계의 유한함을 슬퍼한 건 세상이 주는 분노에 놀라버린 감상적 사고였으리라

  게다가 꽃말은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니. 헤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연인의 사랑 만큼이나 처연하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시들지 않고 우아하게 지는 동백꽃처럼’ 살고 싶다고 하신 시인‘이해인’ 수녀처럼 아름다움을 그저 아름다움으로만 보지 못하는 내 나약한 센티멘탈리즘이 원인이리라.

  지금도 나는 붉은 동백꽃이 몸을던져 뛰어내린 걸 보면 울컥이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렵다.

봄을 바라보는 아침에 손님이 오고 있다.

그리움 한 다발 가슴에 안고. 알록달록한 빛을 꿈꾸는 센티멘탈을 담은 설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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