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死線
안점준
아침 5시 30분 일어나 6시 테니스 레슨 받으러 1층 현관문을 여는 순간 찬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오싹했다. 잠시 정신을 잃을 것처럼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바로 18층 집으로 들어와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동안 체력이 약해진 것인지 무리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창원 우리 집 근처 있는 대학병원 신경과에 가서 검사받으라고 했다. 병원에 가서 증상을 말하고 MRI를 찍었다. 결과 나오는 날에 남편과 병원에서 만나서 함께 갔다. 신경과 앞에 앉아 있는데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2층 성형외과에 다녀오라고 했다. 우리는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둘이 의아한 맘으로 성형외과에서 기다리다 이름을 불러서 의사 앞에 앉아 질문을 했다.
“선생님 내가 왜 성형외과에 온 것인가요?”
“수술하셔야 해서 수술 부위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어디를 수술합니까? 신경과 선생님께 MRI 결과도 아직 듣지 않았는데 수술이라니요? 황당합니다. 저는 수술하게 된다면 서울에서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신경과로 내려가서 담당 선생님에게 내 병명을 들었다.
“육종입니다, 빨리 수술을 서두르셔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처음 듣는 단어였고, 안 좋은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다. 서울에 가서 진료받고 수술하겠다고 하고 나와 각자의 차를 가지고 사무실 들어갔다가 퇴근하기로 했다. 차에 시동을 켜고 떨리는 손으로 육종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육종암은 뼈, 근육, 연골, 지방, 신경, 혈관 등 신체의 결합 조직에서 발생하는 희귀 암‘. 그 당시 검색했을 때는 불치병이라는 단어가 확대되어서 내 몸을 덮었다. 좁은 차 안에서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나와는 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죽음이 이런 모습으로 내게 오는구나. 나는 만감이 교차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내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지?’ 수많은 질문을 내게 던졌다. 제일 먼저 아이들이 생각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보내고 힘들게 사는 아이들에 비하면 내가 지금 간다고 해도 모두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은 괜찮겠지?’ 아니 결혼할 때 내가 예쁜 한복을 입고 혼주석에 앉아야 하는데....
남편이 서울 병원에 빠른 일정으로 예약했다. 병원 가는 날까지 시간은 지구를 멈추어 놓은 듯 더디 갔다. KTX로 서울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신촌 S 병원 신경과로 갔다. 병원에 가면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무슨 병명으로 왔을까? 궁한 마음으로 한참 동안 기다리니 내 이름이 불렸다. 두려운 마음이 먹구름에 지배된 체 의사 옆에 앉았다. 의사는 복사해 간 MRI 사진을 한참 보더니
“왜 왔어요?”
“창원 병원에서 육종이라며 수술해야 한다고 해서 서울 가서 다시 진단받고 수술하겠다고 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다시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오진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벌떡 일어나서 의사와 간호사한테 90도로 연신 폴더인사하며 감사하다고 했다.
'오진이구나, 오진이었어, 감사합니다.' 나는 이 순간까지 걱정했던 모든 마음을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말했다. 이렇게 오진을 통해 나는 사선死線을 넘었다. 병원을 나와 딸을 만나기로 한 신촌 백화점으로 가는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동안 이야기를 들은 딸은 너무 좋아했다. 새 생명을 얻은 마음으로 셋이 제일 비싼 음식을 감사의 마음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창원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 그이가 말했다.
“그동안 교회 식구들이 성가대를 하라고 수없이 말했어, 나는 그 말을 무시했었어. 당신 진단받은 후 아무 이상이 없으면 성가대 봉사하겠다고 기도 했는데, 이번 주부터 성가대를 해야겠어.” 나는 너무 감사했다. 이렇게 이런 방법으로 남편을 봉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구나.
의사가 1년 후에 다시 검사받으라고 했다. 친구가 서울대 병원 신경과 유명한 백 교수님을 추천해 주어서 예약했다. 시간이 되어 병원에 가서 새로 MRI를 찍고 검사한 결과 내 머리가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그건 약간의 기형이며 머리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명쾌한 진단을 받았다. 나에게 오진은 이렇게 와서 사선死線을 넘어갔다. 그동안 이렇게 갈 수 없다는 울부짖음으로 꿈꾼 적도 있었다. 나는 더 행복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의사 오진이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그 사선死線을 넘은 후 나는 순간순간 감사와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지금 부르신다 해도 부끄럼 없이 갈 수 있는 마음으로 연단 되었다. 수채화 같은 수필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글쓰기를 공부한다. 오늘도 내게 온 행복에 풍덩 빠져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