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매혹하는 목소리 (소설반 22.10.18)    
글쓴이 : 김성은    22-10-20 20:27    조회 : 4,293

가을이네요. 설악산 단풍에 취해 수업에 못 오시겠다는 김** 선생님의 연락에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날이었어요. 다음 주 수업은 야외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경기도 평택에서 신입 수강생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좋은 수업이라는 소문을 듣고 오셨다는데요. 대환영입니다.

화자의 목소리

 : 소리 내어 읽거나 소리는 내지 않고 속으로만 읽거나 어쨌든 글을 읽으려면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글은 눈으로만 읽지는 않는다. 읽는다는 건 눈으로 보면서 거기에 담긴 뜻을 헤아려 아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다는 건 글과 교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슬픔이라는 단어를 눈으로 보았 을 뿐인데 가슴속에서 푸릇한 싹이 돋는 것이나 환대라는 단어를 보았을 뿐인데 손안에 따듯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도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증거일 테다. 눈물이 글썽거린다는 문장을 읽는 동안 나직한 울음이 귓가에 들리는 까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읽는다는 건 그렇다. 눈으로 보되 뜻을 헤아리면서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에밀리 그리어슨 양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남자들은 쓰러진 기념비에 대한 존경 가득한 애정의 마음을 품고서, 여자들은 정원사와 요리사를 겸한 늙은 하인 외에 적어도 10년은 아무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집 내부를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품고서.(7쪽)

살아 있는 동안 에밀리 양은 하나의 전통이자 의무이며 관심의 대상이었다. 즉 마을에 세습되는 일종의 책임이었다. 흑인 여성은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는 거리를 다닐 수 없다는 법령을 시행한 바 있던 시장 사 토리스 대령이 1894년 그녀의 부친이 사망한 날, 지금부터 그녀의 세금을 영구적으로 면제하겠다고 하면 서부터, 에밀리 양이 그런 혜택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사토리스 대령은 그녀의 부친이 시 정부 에 돈을 빌려 주었기에 시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상환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딱 대령 세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만이 지어낼 수 있고, 딱 한 여자만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8쪽)

그녀의 얼굴은 고인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시체처럼 퉁퉁 불어 있었고, 파리한 안색 역시 시체를 연상시켰다. 퉁퉁 불은 얼굴에 감추어진 그녀의 두 눈은 손님들이 용건을 말하는 동안 그들의 얼굴을 일 일이 살피고 있었는데, 마치 반죽 덩어리 속에 박힌 두 개의 조그만 석탄 쪼가리 같았다. (9쪽)

그렇게 그녀는 그들을 모조리 퇴각시켰다. 30년 전, 어떤 냄새 때문에 찾아온 그들의 아버지들을 퇴각시 켰을 때처럼. 그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이자 우리가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믿었던 그녀의 애 인이 그녀를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10쪽)

그들이 잔디밭을 다시 가로지를 때 어둠에 잠겨 있던 창 하나에 불이 들어왔고, 그들은 그 불빛을 배경으 로 마치 조상彫像처럼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에밀리 양을 볼 수 있었다.(12쪽)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리어슨 가문 사람들이 실제보다 너무 잘난 척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마을 청년들중에는 에밀리 양의 배필로 적합한 사람은 없다는 듯 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 가문을 다음과 같은 하 나의 풍경으로 여겼다. 뒤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가냘픈 에밀리 양이 서 있고, 앞쪽에는 그녀의 부친이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말채찍을 들고 두 다리를 벌린 실루엣으로 서 있는 풍경으로. 활짝 열린 현관문이 그 두 사람의 모습을 가두는 액자였다. 그녀가 서른이 되어도 여전히 독신으로 머물러 있자, 우리는 기쁨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의 예상대로 되었다는 기분을 느꼈다. 비록 그 가문에 정신병적인 기질이 있다 해도 그녀에게 기회를 잡을 가능성만 있었다면, 그녀가 그 모든 기회를 거절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13 쪽)

부인들은 “그리어슨 가문 여자가 북부 출신 일용직 노동자를 진지하게 생각할 리는 없을 거야”라고 떠들 어 댔다. 하지만 나이 많은 노인네들은 아무리 슬픈 일을 겪었다 해도 진정한 숙녀라면 노블레스 오블리 주를 잊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고 그저 “불쌍한 에밀리, 친지들이 와줘야 할 텐데”라고만 했다.(14쪽)

호머가 스스로 자신은 결혼에 적합한 남자가 아니라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가 남자를 좋아해서 엘크스 클럽에서 젊은 남자들과 술을 마신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다. 그 뒤 우리는 그들이 일요일 오후 번쩍거 리는 사륜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면, 비늘창 뒤에서 “불쌍한 에밀리”라고 말했던 것이다.(17쪽)

우리가 에밀리 양을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몸집이 불고 머리칼이 희어지고 있었다. 그다음 몇 년에 걸 쳐 그것은 점점 더 희어지더니, 진행이 멈추었을 때는 후추와 소금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철회색을 띠고 있었다. 일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의 머리칼은 활동적인 남자의 그것 같은 강인한 철 회색을 그대로 유지했다.(18쪽)

가끔 아래층 창문들 중 하나에서-저택의 위층은 아예 폐쇄시킨 게 분명했다-그녀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마치 벽감에 놓인 조상처럼 앉아 있는 그녀가 과연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 다. 그렇게 그녀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피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며,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고요하고, 괴팍하게. (19쪽)

이미 우리는 위층에 40년 동안 아무도 본 적 없는 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방으로 들어가려면 완력을 써야 할 것임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에밀리 양을 품위 있게 땅속에 묻고 난 뒤에야 그 방의 문 을 열었다. 문을 부순 완력이 방 안의 먼지를 퍼지게 한 듯했다. (21쪽)


: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의 1인칭 복수형 화자 “우리”라는 대명사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누군가 “우리”라고 말할 때 그 안에는 “나”가 은폐되어 있다. 지금 말하는 화자는 분명 한 개인인 나인데도 우리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있고, 만약 우리 안에 포함된 수많은 “나”들이 서로의 말을 이어가며 발화한다 해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화자는 동일한 하나의 인물(목소리)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인물(목소리)의 연쇄일 수도 있다. 마치 이어달리기의 주자들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동시에 우리라고 말하고 있는 나,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나를 대신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소설가가 1인칭 복수형인 우리를 화자로 내세웠다면 이 대명사에서 읽어낼 수 있는 미묘한 어감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화자와 화자의 목소리에 집요했던 포크너라면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에서 그런 화자를 선택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인칭 복수형인 화자를 3인칭으로 받아들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자가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의 주인공은 에밀리다. 때로는 에밀리라는 고유명사로 때로는 그녀라는 대명사로 지칭되는 이 인물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독자는 화자인 “우리”처럼 에밀리를 관찰하게 된다. 

화자의 태도가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는 한 편의 소설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이는 화자의 속성과 관련이 있어서인데 화자가 어떤 감정을 드러내고 감추었느냐에 따라 화자가 말하는 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독자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대로 믿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말이다.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의 화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에밀리가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하거나 달라진 세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조롱하는 등 화자의 시선은 노골적이라 할 만큼 감정적이다. 그런데도 편파적이거나 주관적이라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화자가 제시한 상황들이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화자인 “우리”는 마을 사람을 망라한 집단일 수도 있고 특정한 한 무리일 수도 있으며 특정하기는 하되 범주가 유동적인 무리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라는 화자의 실체는 모호하다. 분명히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며 독자에게 상세하게 사건을 전달하는데도 독자는 이 마을 사람이라는 점만 빼놓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말하는 이가 누구든 “우리” 뒤에 숨는다면 완벽하게 자신을 감출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왜 감춰야 했을까. 아니 정말로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감추었던 것일까.

이 화자들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40년 가까이 아무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간 거였다. 무례하게! 화자의 진짜 욕망은 그거였다. 마을 사람 모두 에밀리가 약사에게 쥐약을 구해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지만 아무도 그런 의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금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고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들은 공정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에밀리를 대하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짜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낸다. 그런데도 독자는 알고 있었다. 이들이 믿을 만한 화자가 아니라는 것을. 화자가 마치 전지적인 존재처럼 에밀리의 집 내부까지 따라 들어가 에밀리의 등 너머로 탁자를 바라보던 그 순간, 화자가 얼마나 비열한 호기심을 지닌 존재인지, 얼마나 집요하고 파렴치한 존재인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이 범죄를 증오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는 것 역시.

에밀리의 약혼자인 호머 배런은 화자인 마을 사람들이, 남부인인 마을 사람들이 경멸할 이유가 충분한 인물이었다. “북부 출신의 일용직 노동자”인데다가 스스로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떠벌렸으니까. 더구나 남자를 좋아한다고 소문 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인물을 정말로 처치해 버린 건 에밀리였다. 우리 모두 누군가를 처치해버리길 바란다. 그러나 그럴 용기도 없고 그렇게까지 해야 할 만한 정당한 명분도 없다. 그렇지만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윌리엄 포크너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혐오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혐오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혐오는 그들의 가슴 속에 숨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뒤에 숨은 “나”는 바로 우리의 가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