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합평
박진희 <런치 아워>
●발제 합평
이영희 <가람 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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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업자료
가람 이병기 메모
李秉岐(1891-1968), 호 가람(嘉藍). 본관 연안(延安, 현 연백).
익산에서 변호사 이채(李?)의 큰아들로 출생. 한학에 전념 중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읽고 신학문으로 방향 전환.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영향 받아. 근대 중국 계몽운동과 변법자강(變法自彊)운동가로 활약. 중국의 모든 소수민족 통합 주장.
쑨원과는 미묘한 차이, 중화민국 설립(1912) 후 위안스카이 지지했으나 그가 황제화 되자 반대. 결국 중화민국 지지. 유럽 방문 후 서양문명의 파산을 선언했고, <조선망국사략>, <조선 멸망의 원인>, <일본병탄 조선기> 등 논설. 근대 중국 최고의 학자이자 저술가, 운동가.
전주공립보통학교(1910)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 졸업(1913).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에게 조선어문법 전수. 남양(南陽), 전주 제2, 여산(礪山) 등지에서 공립보통학교 교편. 산문시 <수레 뒤에서>(<공제(共濟)> 1호, 1920. 9)로 문필활동 시작.
조선어문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1921) 권덕규(權悳奎), 임경재(任暻宰) 등과 발기, 간사 맡다.
1922년 이후 동광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직. 1924년 경 문단에서 시조부흥론 논의에 공감, 활동 시작. 시조회(時調會) 발기(1926),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1928).
시조부흥론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립하던 최남선, 이광수의 국민문학론의 일환으로 대두했다. 최남선은 <백팔번뇌(百八煩惱)>(東光社, 1926)에 발맞춰 논문 <조선국민문학(朝鮮國民文學)으로서의 시조(時調)>(朝鮮文壇 16호, 1926.5)에서 “시조가 조선국토, 조선인, 조선심, 조선어, 조선운율을 통하여 표현된 필연적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鄭寅普) 등의 시조부흥론을 넘어 현대 시조론을 제기한 것이 이병기와 이은상(李殷相).
가람은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를 비롯하여 <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 <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 <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 <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시조론 전개.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1930).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조선문학 강의.
1939년부터 <문장(文章)>지 통해 조남령(曺南嶺), 오신혜(吳信惠), 김상옥(金相沃), 장응두(張應斗), 이호우(李鎬雨) 등 신인 추천.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 1939).
그는 시조를 창(時調唱)에서 분리, 현대시와 동일시,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 창작법 주장.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1942).
朝鮮語學會事件(1942.10-1945.1).
1941,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이 공포되자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 , 출간에 박차.
1942, 여름방학 홍원군 전진역(前津驛), 박병엽, 국방복 안 입은 장발로 홍원경찰서 연행, 가택 수색 중 그의 질녀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의 2년 전 일기장, “오늘 국어(國語)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 라는 문장. 당시 국어란 일어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담임 내사, 박영옥은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를 사용해 처벌 받았음을 확인했으나. 왜 ‘조선어’를 ‘국어’로 표기했느냐는 추궁에서 정태진(丁泰鎭) 교사 거론. 1년 전 이 학교를 사임한 그는 ‘조선어’를 ‘국어’로 불렀다고 몰아댐. 그는 교직 사임 후 서울에서 조선어학회 일.
다른 증언으로는 박영옥(朴英玉)이 기차간에서 조선어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安田稔, 安正默) 들켜, 취조받으면서 터졌다고도 한다.
1942.9.5. 정태진 연행,
한편 조선어학회 사무실 뒤져 대종교 계 독립운동가 윤세복(尹世復)이 만주에서 이극로에게 보낸 편지 발견, 이를 구실로 조선어학회 일제 검거 시작.
1942. 10.1. 이중화(李重華), 장지영(張志暎), 최현배(崔鉉培) 등 11명을 서울에서 구속, 함남 홍원으로 압송하면서 사건은 확대, 1943.4.1.까지 33명 검거, 증인은 48명.
함흥지방재판소, 1944.12-1945.1.까지 9회의 재판.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 언도. 정태진은 1945.7.1. 만기 출소.
나머지는 8월 17일 석방. 압수당한 우리말사전 원고, 일부 피고인들이 항소, 그 증거물로 서울로 소낸 게, 8.15 직후, 수하물 창고에서 발견, <우리말 큰사전>으로 출간.
옥중 체험작품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묵직한 철책문이 덜그럭 닫치는고나 / 도몰아 이는 시름 가슴이 메어지고 / 하룻밤 지내는 동안 적이 수(壽)를 덜었다. // 버버리 그저 있고 처녀는 어제 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