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의 방어기제
여름학기가 시작된 6월 3일 루쉰의 『아Q정전』 1장~3장까지 읽고 배웠습니다. 9장까지 이루어진 『아Q정전』은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루쉰이 1921년 쓴 중편소설입니다. 루쉰은 혁명의 실패요인이 무엇인지 아Q란 인물과 그를 둘러싼 구경꾼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포인트로 펼쳐집니다. 아Q의 정신 승리법으로 전개되는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혁명을 둘러싼 아Q의 비극적 죽음이 전개됩니다.
1장 서문은 화자가 소설 『아Q정전』의 제목 및 주인공 설정과 연루된 여러 어려움부터 말합니다. 글의 제목이 ‘바르게 전하여 오는 전기’라는 의미를 담은 ‘정전’(正傳)으로 정한 것과 아Q라는 인물의 성과 이름, 본관마저 불확실하다는 점 등을 보여줍니다. 아Q란 인물을 그리면서 작가는 어느 특정 캐릭터가 아닌 당대 중국인의 전형을 보여주고자 한 듯합니다. Q에 청나라 말기 중국인의 변발한 머리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2장과 3장에서 아Q의 정신 승리법이 드러난 언행이 하나씩 묘사됩니다. 정신 승리법이란 타인으로부터 조롱이나 멸시를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포장하고 감추는 그릇된 사고과정 같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자신을 정당화 혹은 합리화(Rationalization)는 미성숙한 태도입니다. 자기 최면에 걸린 듯 패배를 승리로 전환해버리는 아Q의 대표적인 언행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말한 다양한 심리적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와 연관하여 정리해봅니다. 방어기제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 밑바닥에 쌓여 있는 불안이나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거나 감소하고자 할 때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1장 108면에서 아Q는 웨이좡 마을에서 지위가 높은 자오 나리와 일가라고 말합니다. 자오 나리의 아들, 수재보다 항렬이 삼대나 위라고 떠벌리면서요. 물론 자오 나리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쫓겨납니다. 여기서 동일시(Identification)란 방어기제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낫다고 판단한 인물과 강하게 유대하면서 만족해하지요.
한편 아Q는 자존심이 강한 만큼 자신의 머리에 생겨난 부스럼 자국 때문에 생겨난 콤플렉스도 심합니다. 콤플렉스(complex)가 열등의식으로 번역되기고 하지만 복합체란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 우린 콤플렉스 자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댁과 등지면 ‘시’자 들어가는 시금치도 싫은 것처럼 아Q는 부스럼이란 말뿐 아니라 부스와 비슷한 발음조차 싫어합니다. (그린비 112면)
아Q내면에 콤플렉스가 강하게 작동하는 예가 왕털보와의 만남에서 보입니다. “왕털보는 부스럼 자국에다 수염이 많아 왕 부스럼 털보라 불렸는데 아Q는 거기서 부스럼을 떼내어 버렸다.”(117면) 이 문장에서 아Q가 부스럼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털보에게 자신의 모습이 투사(projection)되어 더 견딜 수 없습니다. 왕털보와 이 잡기에서 패하자 “그(아Q)의 부스럼 자국이 벌겋게 달아올랐다.”(117면) 자아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콤플렉스를 누군가 건드리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요 그때 벌겋게 달아오르는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갑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정원에서 인디언 분장을 한 기택(송강호)의 분노에 휩싸인 벌건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택의 심기 즉 콤플렉스를 건드린 박사장에게 참을 수 없었으니까요.
왕털보에게 이어 아Q는 첸 나리의 큰 아들 ‘가짜 양놈’에게 내뱉은 욕설 때문에 매를 맞는 수모를 겪습니다. 아Q는 강자 앞에선 약하게, 약자에겐 강자 행세를 하며 돌아다닙니다. 왕털보와 가짜양놈에게 당한 굴욕을 젊은 비구니를 괴롭히는 행동으로 보상(compensation)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전치, 대치, 전위(displacement)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고통이나 패배가 겉으론 망각된 듯 보이지만 그건 잊힌 게 아니라 그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가 다시 기억되어 드러납니다.
아Q의 비겁하고 치졸한 행동이 정신 승리법으로 위장한 채 드러난 이야기가 전반부 핵심입니다. 아Q는 집도 가족도 없이 날품팔이로 살아가는데 그가 머무르는 공간에 주목해봅니다. 신을 모셔두는 사당에 기거하는데 그건 과거 봉건적 체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당대 중국인을 루쉰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치 같습니다.
아Q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쳐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가령 스스로 낮춤으로써 상대방보다 더 돋보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머릿속으로 그리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언행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다 싶어 반성합니다. 혁명을 매개로 전개된 소설에서 아Q란 한 인물 내면에 투사된 여러 방어기제를 들여다볼 수 있어 마치 심리극을 보는 듯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