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 달동네 밥상머리
제가 용산반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정겨웠던 일중의 하나가 수업 전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일이었답니다. 저희는 이 점심을 달동네 밥상머리라고 부르지요? 이번 주는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하였지만, 매 주 12시 30분 서관 5층 데리야끼 앞 벤치로
올라오시면 교수님과 함께 이 정겨운 밥상에 둘러앉으실 수 있답니다.
1교시 명작반 제3강 위고 <<사형수 최고의 날>>
위고의 말년 인생역정과 함께 했던 역사의 흐름을 되짚어 본 수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의 정치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에 대해 보충합니다.
*보불전쟁 : (1870.7.19.~1871.5.10.)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또는 보불전쟁(普佛戰爭)은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목적으로 일으킨,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에스파냐 국왕 선출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의 분쟁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엠스전보(電報)사건은 사건의 연출자인 비스마르크의 예견대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양 국민을 격앙케 하여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군비가 우세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제국뿐만 아니라, 남독일 제국의 지지까지 얻어서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참모총장 몰트케의 작전에 따라 프랑스 국내로 쳐들어갔다. 독일 측은 총참모장이었던 몰트케가 지휘하였고,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지휘하였다. 독일군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술 · 전략적으로도 프랑스군을 압도하였다. 독일 측은 잘 발달된 철도망을 통하여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킴으로써 전쟁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일군은 곧 프랑스군을 포위하고 승패를 결정짓는 공격을 개시하였다. 9월 2일 세당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전의를 상실한 나폴레옹 3세는 10만의 병력과 함께 독일에 항복하고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틀 뒤 파리에서 공화국이 선포되고 새 정부는 민족 항전을 천명하였다. 공화국군의 처절한 항전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프랑스를 점령해 나갔다. 파리에 집결한 공화국 시민군의 4개월에 걸친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에 파리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나머지 지역의 저항도 무기력하게 끝나고, 2월 2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전 협상이 맺어지게 된다.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체결된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프로이센은 알자스 - 로렌 지방을 획득하였으며,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받게 되었다. 보르도에서 선출된 새 의회에 의해 이러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이 진행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3월 18일부터 5월 18일까지 파리 코뮌이 수립되었으나, 새로운 공화국 정부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당하고 약 3만 명이 처형되었다. 한편 프랑스에 대한 승리는 독일 전체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이로써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1870년 9월 1일에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와 독일 통일에 대한 조건들이 협의된 상황에서 독일의 통일을 막을 세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871년 1월 18일에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독일 역사상 두 번째 제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첫 번째 제국이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었던 반면, 제2제국은 명실상부하게 황제의 권한이 보장된 제국이었다. 독일이라는 국가가 근대적인 민족 국가로 등장함과 동시에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파리코뮌 : 1871년 3월 아돌프 티에르 임시정부 총리가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파리의 질서유지를 위해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을 해산하려한 데 반발해 일어난 민중 봉기 사건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소집된 국민의회는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였고,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성립, 2월말 베르사유강화가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알자스·로렌지방의 할양을 포함한 조약의 굴욕적 내용에 분격한 파리 민중은 국민군연합과 그 중앙위원회를 결집해 격렬하게 정부에 맞섰다. 3월 18일 정부가 기습적으로 파리 민중지구의 국민방위군 진지를 탈취하고 국민방위군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파리 민중의 반격으로 정부는 베르사유로 쫓겨나고 파리의 실권을 민중이 장악하였다. 파리시 수비대 중앙위원회의 '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시내 일부 지역을 일종의 해방구인 ‘코뮌’으로 선포하고 코뮌 정부를 수립했다. 프랑스 대혁명 정신에 충실한 각종 개혁 정책도 발표했다. 이들은 2개월여 동안 유혈 저항하다가 정부군에 진압됐다. 양측 간의 충돌로 코뮌 측 2만 명과 정부군 750명이 사망했다. 코뮌 와해 뒤 봉기가담자 3만8000명이 체포되고, 7000명이 국외 추방됐다. ‘파리 코뮌의 벽’은 1871년 5월 28일 마지막 항전을 하다 처형당한 파리 코뮌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벽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동부의 공동묘지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1871년 5월 28일 저녁 페르 라쉐즈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던 147명의 코뮌병사들은 정부군에게 잡혀 정식 재판을 받지 못하고 총살당했다. 병사들의 시신은 그들이 총살당한 벽 아래로 그대로 내던져졌다. 파리 코뮌의 벽은 코뮌 병사들이 총살된 바로 그 자리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조각과 묘비가 남아있다. 벽면에는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파리 코뮌의 벽은 오랫동안 프랑스 좌파의 정치적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이 벽은 큰 의미를 가져왔다. 이를 증명하듯 코뮌의 벽 바로 건너편에는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의 묘지가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 좌파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좌파 진영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되새기고 사람들에게 이를 각인시키고자 이곳에서 자주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교시 수필반
김유정 샘의 <까사 봉봉> 한 편을 합평했습니다.
말씀으로 들려주신 샘의 결혼 스토리를 보충해 주시겠다고 하시니 수정 본은 훨씬 흥미로운
글이 되리라 기대가 됩니다^^*
3교시 티타임
신재우 샘께서 열어주신 티타임에서 봄 소풍을 다시 의논해 보았습니다.
다음 주는 정상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23일에 나들이를 가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휴강 예정이던 30일에는 1교시 샘들과 함께 영화 관람 야외수업을 진행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담 주 점심식사 시간과 1교시 수업 전에 구체적인 의논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883년 수정한 유언장에 빅토르 위고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이 돈을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데 쓰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사람의 기도이다.”
함께 사유하며 글을 쓰는 저희들의 영혼의 눈 또한 언제나 열려있기를 기도하게 되는 화창한
아침입니다. 샘들, 행복한 봄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