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문 수필평론가 양성과정>
<실존을 위한 생의 찬가>
- 맹난자의 《본래 그 자리》를 읽고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에는 오류가 없다’는 상대적 관점주의가 기염을 토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하지만 작품의 내재세계는 여전히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사람에게만 들린다. 자기 키를 넘는 강물에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 글을 논평하는 일이 그렇다. 《본래 그 자리》는 내용의 깊이와 스케일로 보아 필자가 뛰어들 강이 아니다. ‘인간은 참으로 넓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 그대로 저자 맹난자가 섭렵한 독서의 범위가 참으로 넓다. 주역으로부터 공맹孔孟, 노장老莊에 이르는 동양철학의 고전은 물론 미국, 러시아, 유럽, 중남미, 일본 등 수 백 명의 근현대 작가 그리고 철학가, 예술가들의 생애와 사상이 도도하게 출렁이는 대하大河가 《본래 그 자리》다. 필자의 독서량과 사유의 보폭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청탁을 끝내 사양하지 않은 것은, 글자 그대로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이 글은 텍스트에 대한 한 독자의 학습노트다.
저자의 작품 속에서 불교적 사유세계와 노장의 세계관을 감지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본래 그 자리》가 나를 새롭게 잡아당긴 것은, 저자의 삶과 사유를 관통하고 있는 단일한 수맥이 얼마나 많은 문학과 철학의 지류들을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저자가 특히 칸트,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등 서양철학의 거목들을 자신의 사유의 정원으로 초대하여 대화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동서양 지성의 통섭이요 향연이었다. 저자의 독특한 예술적 지평과 난공불락의 철학적 요새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숙연해 진다. 한국수필이 갑자기 성장한 것 같아 수필가의 한 사람으로서 적지 아니 상기되어있는 나를 발견한다.
작가의 창작노트는 사유에서 오고, 사유는 독서에서 온다. 그런데 독서의 방향을 지시하는 건 작가의 삶 자체 아니던가. 저자가 매달린 예술가들의 광기와, 인간의 죽음이라는 철학적 화두는 바로 그의 굴곡진 삶에서 출발한다. 맹난자는 죽음에 천착하는 철학수필가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도 죽음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론에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향한 지극한 성실함, ‘지성至誠’을 만난다. 지성이야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실존적 삶의 전부가 아닌가. 물론 가족을 잃은 개인적 아픔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그가 죽음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은, “생명의 사라지는 과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살지 못하고’ 사라진 인생에 대해서다.” 삶을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살고자하는 집요한 실존의식이다.
광기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집념도, 어머니를 통한 개인체험이 동기가 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병들지 않은 정상인의 영혼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참삶’을 붙들기 위하여 그가 매달린 광기와 죽음은 기제機制일망정 주제는 아닐 터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를 짙푸른 나무에 비유한다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뿌리들이 땅 속에서 서로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며 꼬옥 끌어안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4백여 페이지의 자그마한 이 책 속에는 인간의 모든 것 특히 ‘우주 속의 인간’이 들어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수필집이라기보다 철학적 지성의 에세이집이다. 시청자를 매료시킨 연속극 <해를 품은 달>이 있었다. 《본래 그 자리》는 ‘철학을 품은 문학’이다. 제1장에 펼쳐지는 문학적 플롯뿐만 아니라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저자의 감성적 숨결은, 지성의 소통 또한 감성에 바탕 해야 극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 11장으로 구성된 중간제목에 따라 순서대로 따라가 본다
홍혜랑
《한글문학》으로 등단(1994)
에세이집 《이판사판利判事判》 《자유의 두 얼굴》 《문명인의 부적》
3인 공저 일어판 《한국여류 수필선》
제26회 현대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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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랑 작가는 긴 서평으로 강의 시간 내내
같이 자리한 맹난자 작가와 소통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고
맹난자 작가의 끝없는 사유와 연구를 알기에는
오리무중 상태입니다.
다음 강의 시간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
실질적으로 수필평론에 첫 삽을 뜬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