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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순간이 번져온다    
글쓴이 : 한지황    15-10-12 19:28    조회 : 4,346

함민복의 수필집 <<눈물은 왜 짠가?>> <가족사진>을 공부했습니다.

스승님의 밑줄 쫙~~”이란 말씀에 밑줄 그은 명문장들을 모아봅니다.

균종 내가 은은하게 고여 있다.’

물만 고일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냄새도 향기도 종소리도 고여 있을 수 있습니다.

 

버섯들은 참 조용하다. 내성적이다.

그림자가 몸에서 외출을 한다.

하얀 맨살 부끄럽다고 갓으로 얼굴가린 버섯들

음지식물인 버섯은 그늘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야하는 버섯들을

조용하고 수줍어한다고 재미있게 표현하였습니다.

 

흙 속에서 고소한 참기름을 뽑아 올릴 수 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땅 속에는 무궁무진한 맛이 숨어 있나봅니다,

고구마를 캐면 고구마 맛이 감자를 캐면 감자 맛을 주는

땅의 위대함을 깨닫습니다.

 

자식새끼 입속으로 밥숟가락 들어간다. 저기가 극락이다.’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부모들은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자식들이 잘 되었을 때 당사자들보다도 행복한 것이 부모 마음이지요.

 

도끼로 찍고 향기에 놀라다

도끼로 나무를 찍었더니 베어진 나무 기둥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이 멋진 문장으로 태어났습니다.

 

행복한 순간이 번져온다.’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목련꽃이 피는 일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절의 순환을, 너와 나 사이 사랑과 이별의 사건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돔을, 시간과 공간의 옮김을

시인은 모두 번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감이 도화지 위에서 서서히 번지듯이 말입니다.

번져야 사랑이고 죽음조차도 번져야 삶을 환하게 밝힌다는

시인의 생각에 읽는 이들의 마음이 환해질 것 같습니다.

 

 

 

물꽃 / 이재무

 

 

비 오는 날 호수에

 

물꽃 핀다

 

수직으로 빗방울은 떨어져

 

수면에 동심원을 그린다

 

수평으로 잔잔히 퍼지는 물무늬

 

세모시처럼 가늘고 고운

 

저 아름다운 적막의 동그라미 속,

 

누대의 시간 흐른다

 

소란과 수다에 지쳐

 

두꺼워진 몸 가누고 싶다

 

그리하면 한지처럼 얇아져

 

녹아서 형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은 죄가 많아

 

선한 것이 눈에 불편한 사람

 

물꽃은 뿌리 없으니

 

고통도 없을 것이다

 

졌다 피고 피었다 지는 경이

 

순간의 삼매경,

 

차마 어지러워서 땀에 전 작업복처럼

 

무거운 내 오후의 생

 

비틀거리며 흠뻑 젖는다.

 

 

세상에서 가장 생명이 짧은 물꽃.

단순한 물의 번짐이 아닌 죄에 대한 성찰로 인해

모든 사람의 가슴에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수묵 산수/김선태

 

가창 오리떼 수십만 마리가

 

겨울 영암호 수면을 박차고

 

새까만 점들로 날아올라선

 

한바탕 군무를 즐기시는가

 

싶더니

 

 

가만,

 

저희들끼리 붓이 되어

 

거대한 몸 붓이 되어

 

저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신가

 

정중동의 느린 필치로 한 점

 

수묵 산수를 치는 것이 아니신가

 

 

제대로 구도를 잡으려는지

 

그렸다간 지우고를 반복한다

 

일군의 세필로 음영까지를 더하자

 

듬직하고 잘 생긴 산 하나

 

이윽고 완성되는가

 

싶더니

 

 

아서라, 화룡점정!

 

기다렸다는 듯 보름달이

 

능선 위를 떠올라

 

환하게 낙관을 찍는 것이 아니신가

 

 

보시게나

 

가창 오리떼의 군무가 이룩한

 

자연산 걸작

 

고즈늑한 남도의 수묵 한 점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새들은 간격, 사이를 지키기 때문에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간격을 무시하기 때문에 수시로 사건을 일으키지요.

자연은 간격을 지킵니다.

자연산 걸작 수묵화를 그리는

가창 오리떼의 군무가 보고 싶습니다.

보름달까지도 낙관을 찍은 수묵화는 얼마나 멋질까요?

 

오랜만에 오신 박영희샘이 홍시 한 박스를 들고 오시는데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시는 분이 김포에서부터 사 들고 오셨으니까요.

그 정성에 걸맞게 홍시는 참 달콤했어요.

다들 감사히 먹었습니다.

2회 풀꽃문학상을 수상하시게 된 스승님께

우리 모두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상복이 많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스승님의 시가 제대로 인정을 받는 듯해서

제자들로서 무척 기쁘고 자랑스럽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순간이 번져옴을 느낍니다.


진미경   15-10-12 19:55
    
강의후기가 아닌 한 편의 수필을 읽은 듯합니다.
수업이 끝난 지 두 시간만에 올린 것도 놀라운데 말입니다.
여름이 번져 가을이 되었다니..... 시적 표현에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아름다운 10월이 고맙고 행복해요.
일산반님들 화이팅해요! 그리고  이재무 교수님의 풀꽃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지황   15-10-12 21:42
    
시는 심장에 꽂혀서 빠지지 않는 화살과 같다는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시를 배울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됩니다.
번짐에서 이토록 심오한 발견을 한 시인이 부럽기만 합니다.
시월에 고마움을 느끼는 미경샘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을 쳐다보면 늘 행복할 것 같아요.
석양을 바라보며 집까지  걸어오는 길, 구름도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놓았더군요.
자연이 지닌 붓은 언제나 아름다운 그림을 선사하고  그것을 바라볼 수있는 여유에 감사할 뿐입니다.
최영자   15-10-12 22:17
    
`행복한 순간이 번져온다 `  후기 제목을 보며 미소가 번져옵니다.


강의실 가득 쏟아져 들어온 따뜻한 햇살을 어깨로 받으며,  홍시를  반으로 쪼개  입속에 살며시 넣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행복이 소리없이 옆 샘들에게 번져감을 느낄 수 있었지요.
누군가 내게 잘못을 해도 용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함.
홍시 두개 먹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여자. ㅎㅎ

가을에는 일조량이 적어 우울증이 찾아 온 다고 합니다.
거실에 햇빛이 쏟아질 땐  맘껏 노출하여  일광욕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반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지황   15-10-12 22:57
    
행복 바이러스가 오늘 강의실에 넘쳐났군요.
배시시  웃는 영자샘의 예쁜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번지게 하지요.
저도 홍시를 무척 좋아하는지라 실컷 먹었어요.
근래 먹은 홍시 중 최고였지요.
영희샘의 따스함이 듬뿍 가미되어서 그랬나봐요.
홍시와 함께 무르익어 가는 가을,
한번이라도 더 하늘을 쳐다봐야겠어요.
박래순   15-10-12 22:58
    
가을입니다. 글도, 홍시도, 우리 님들 입고 나온 의상도 오늘은 황갈색으로 번진 날이었어요. 
그리움이 번지면 시가 되고, 사유가 번지면 수필이 되고, 가을이 번져서 겨울을 적시려 하나 봐요.
 오늘 밤 꽤 으스스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몸에 온기 번지도록 일찍 주무세요.
한지황   15-10-13 07:29
    
ㅎㅎ 오늘의 키워드는 단연코  번짐이군요.
번짐의 효과, 대단합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번짐의 파장을 꼭 기억해야겠어요.
이왕이면 긍정적인 번짐을  하고싶어요.
누구보다도 월등한  래순샘의 서정이 번진 수필이  참 좋았습니다.
공인영   15-10-13 16:59
    
'번짐' 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마스카라 번진 눈에서 검은 눈물을 찍어내던 빨간 여배우의
가녀린 손가락, 그 끝에 걸린 뽀얀 담배연기가 먼저 생각나곤 하니...^___^;;   
상당히 비문학적이며 퇴폐적이지 않을 수 없음을 잠시 반성함다. 킥.

그에 비하면
우리가 서로에게 무언가로 스미고  번져나가는 요즘 일산반의 어울림이
참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구나 새삼 깨달으며 따뜻해집니다.

꽃가라 촘촘한 스승님 남방이 단풍이고 낙엽인 냥  훔쳐보며  영희샘의 홍시까지
먹고 있자니 수업의 당도가 기가 막혔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뭉클하게 젖어들던
박래순 샘의 작품을 대하며 그저 내 슬픔, 내 고통, 내 절망이 가장 큰 것이라 여겼던
세월들이 부끄럽기도 했구요.  이만하면 감사하고 다행했던 삶이었던 것을...
결혼 30주년을 막 넘긴 제  오후의 인생은 조금 더 진실되고
순하며 욕심없이 가보자는 다짐도 해보며 돌아왔습니다. ^__^;

이렇게 좋은 날씨, 집에 주로 있는 제가 한심합니다요.
벗들께선 가능하면 문 밖에서 일어나는, 저 급속도로 진행되는
붉디 붉은 번짐의 향연에 동참하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그리하여 가을 끝 어느 날, 스승님 주체하지 못할 만큼
새빨간 단풍글들로  합평을 독촉하며  풍성한 가을 수확해보자구요.
물론 환절기 감기 , 독감은 요리조리 피해가며 낭만 아낙들 되시기를요.
한 주 잘 보내시고
담주에 저도 조금 더 물들어 오겠습니다. ^___^  반장님 수고하셨숑!
한지황   15-10-13 23:42
    
구수한 인영샘의 글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만큼이나 감미롭네요.
하루 하루 달라지는 잎사귀 색깔들을쳐다보는 게 요즘 제일 큰 즐거움이지요.
그러나 거짓말처럼 어느날 갑자기 확연히 다른 색깔로 변모한 단풍들에 눈이 휘둥그레지겠지요.
그리곤 속절없이 가지를 떠나야만 하는 잎사귀의 운명을  지켜보아야 하고요.
깊어가는 가을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