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묵묵히 무게를 견뎌온 저 순결한 이타    
글쓴이 : 한지황    16-08-08 19:14    조회 : 3,005

의자만 남아서 / 길상호

 

좀처럼 말이 없던 의자인데요, 당신이 떠나고 난 뒤 부쩍

 

말이 늘었답니다. 이제는 바람의 기척에도 빠짐없이 대꾸를

 

합니다, 쇳내 나는 말들은 못처럼 삭았는데요, 잠 못들던 당

 

신의 술주정인지, 마른 혀로 겨우 밀어내던 유언인지, 아니

 

면 햇빛처럼 먼지처럼 떠돌던 영혼이 내쉬는 한숨같기도 한

 

데요, 삐걱삐걱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늘 어두웠던

 

당신 어깨처럼 기울어진 의자, 당신의 시선이 머물기 좋아하

 

던 목련 가지엔 거미줄만 흔들리고요, 껍데기만 남은 낮달이

 

흔들리다, 꽃잎처럼 뚝 떨어지고요. 의자는 또 옹이 속에서

 

흔들리는 목소리를 꺼내놓습니다. 숨소리와 함께 식어가던

 

당신의 말이 귓속에 들어와, 삐걱삐걱....

 

 

옹이 속에서 흔들리는 목소리를 꺼내놓는다는 시적 표현이 기가 막힌 시입니다.

생전의 아버지가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시인에게

의자는 바로 아버지입니다.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아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 좋은 의자 아녔나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 시에서 의자는 사랑입니다.

참외밭에 지푸라기를 깔고

호박에 똬리를 받치듯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아들이 클수록 아버지는 아들이 의자가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과연 의지할 수 있는 아들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식당 의자 / 문 인 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앞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

 

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

 

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부셔져서 버려진 의자는 뼈만 남았습니다.

원래 볼륨이라곤 없었던 플라스틱 의자의 다리는 앙상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의자는 보처럼 편안합니다.

휴가에 대해 생각 중인 시인도 한 때는

저 의자처럼 분주하게 봉사 헌신하고 살았지요.

이제는 쓸모가 없어져 휴식을 취하는 의자는

바로 현대인의 초상입니다.

죽도록 헌신하다 퇴직한,

강제된 휴식을 가져야 하는 쓸쓸한 노년의 모습입니다.

젖어도 젖을 일 없는이란 한 번 젖고 나면

그 이후로는 젖는다는 표현을 쓸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마른 상태에서 젖는 것이지 이미 젖은 다음엔 젖는 것이 아니니까요.

 

 

넘어진 의자 / 이재무

 

누가 저 의자를 넘어뜨렸나

 

한 평 반 벌방 속 젖어 축축한 자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주던 의자

 

고시원 옥상에 버려져 있다

 

한쪽 다리가 꺾일 때까지

 

비닐가죽 깔판 속 근육 뭉친 솜들이

 

터진 틈으로 질질 샐 때까지

 

묵묵히 무게를 견뎌온

 

저 순결한 이타,

 

누가 있어 기억이나 해줄 것인가

 

비명도 없이 쏟아지는 비

 

흠뻑 젖은 제 영혼 추슬러

 

스스로의 무릎에 앉히고 있는,

 

버려진 의자

 

 

시인이 살던 아파트 앞 5층짜리 고시원에는

원래 용도와는 다르게 일용직, 수험생 등

소위 인생 따라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옥상에서 담배를 피던 시인은

아무도 없는 고시원 옥상에

고장 난 의자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멀쩡할 때는 유용했을 의자를 바라보면서

순결한 이타란 남을 위해 베풀 때만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지금은 버려진 존재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의자에 관한 네 편의 시는 다양하게 의자를 해석했습니다.

어느 시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지요?

내가 생각하는 의자의 이미지는 무엇인지요?

의자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처서도 지났건만 폭염은 수그러들 생각이 없나 봅니다.

총무님이 깨끗이 씻어서 일일이 포장해 오신 복숭아는 꿀맛이었지요.

늘 살림을 야무지게 해주시는 데다

정성껏 간식도 선물해주시는 정미 총무님께 감사드립니다.

광복절로 휴강을 하는 다음 주만 지나면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겠지요.

조금만 참으면........


진미경   16-08-09 17:17
    
후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들었는데 돌아서니 잊어버린 내용을
알알이 꿰어 선물로 주신 느낌입니다.
 여름밤의 매력은 시원한 바람인데 요즘은 열대야라서 자도 피곤하네요.
지난 1994년의 여름이 더 기온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최근엔 가장 더운 여름같아요.
네! 조금만 참으면 가을의 문턱에서 떠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의자는 휴식입니다. 힘들고 지칠때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되고 싶어요.
아마도 저 역시 그런 의자에 앉아있고픈 마음이 간절하지요.
한지황   16-08-10 23:16
    
저에게도 의자는 휴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의자를 테마로 그림 몇 편을 그리면서
감상하는 이들에게 휴식을 선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었지요.
아늑함도 같이 선물하고 싶었어요.
대화의 이미지도 떠오르고요.
미경샘과 함께 의자에 앉아 대화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