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중국문학기행, 25. 두보杜甫의 성장과 유랑(평론반)    
글쓴이 : 김숙    23-05-03 00:53    조회 : 1,183

1부 중국문학기행

 25. 두보杜甫의 성장과 유랑

 - 두보杜甫(712.2.12770) Du Fu. 자는 자미子美이다. 이백李白(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이다. 이백이         신동이라면 두보는 노력파라는 평가가 있지만 두보 역시 천재다.

- 두보의 선조는 섬서성陝西省(Shaanxi) 서안西安 동쪽 두릉杜陵에 거주했다. 특히 조부 두심언(杜審言, 杜审言, -708)은 당나라 초기 유명 시인으로 선부원외랑(膳部员外郎, 礼部膳部司次官)을 지냈고 증소미도赠苏味道를 지었다.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深()塞马肥천고마비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 두보는 712(1), 杜甫生于河南(황하 남쪽) 巩县(鞏縣. 巩义市. 河南省省辖, 郑州市代管县级市巩县城),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둘째 고모 집에서 성장했다. 3세 때 고모 아들과 함께 역병에 걸렸는데 고종사촌은 죽고 두보는 살았다. 고모가 아들보다 두보를 더 보호하였다. 몸이 허약했던 그는 병치레도 많았는데 고모 덕에 10대 이후에는 황소처럼 건장해졌다. 742년에 고모가 죽자 두보는 당나라의 의로운 부인(有唐義姑)”라고 칭송했다

- 717(6), 河南의 언성郾城에서 公孙()大娘무용 검기혼탈무剑器浑脱舞을 보고 평생 기억했는데 나중 공손대랑 제자들의 공연을 보면서 어렸을 때 기억을 상기했다.

- 731-734(20-23), 游吴越(현 강소성과 절강성) 넷째 숙부와 다섯째 고모부가 이 지역(江寧, 현 강소성 남경)에 거주했다. 와관사(瓦官寺, 晉 武帝 때 건립, 80미터 누각이 유명하다. 位于南京市秦淮区集庆路南侧, 又称古瓦官寺)에서 고개지(顧愷之, 344~406. 동진의 화가) 벽화 유마힐상(維摩詰像)을 감상했다.

- 735(24), 回洛阳应进士考试, 낙방. 736-740(25-29), 开始了第二次漫游齐赵(齊趙, 현 산동성과 하북성 남부). 평생 친구 ()源明(본명 蘇預. 시인)을 만났다.

- 741(30), 归东都(낙양). 筑居于洛阳首阳山下土室. 선대의 묘가 수양산에 있었다. 杨氏结婚. 장인(楊怡)은 농업관장 보좌직 말단 공무원이었다. 수양산 밑 토굴에서 신혼생활을 했는데 금슬이 좋았다.

- 742-744(31-33), 在洛阳. 33세 때 李白(장안에서 쫓겨난 처지)相遇, 二人 畅游齐鲁, 访道寻友, 谈诗论文, 有时也议论时事. 이태백이 궁중에서 쫒겨 난 시절 두 거장이 만났다. 얼마나 좋았겠나? 제나라와 노나라를 돌면서 신나게 놀고 술 먹고. 두 시인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거다.

-장안에서의 곤궁기(35-44), 746(35), 장안长安으로 되돌아갔다. 아버지 죽음으로 경제적인 조건이 악화되었다. 친인척에게 신세 지기, 구걸, 종남산에서 약초 캐어 팔기도 했다. 괄시받은 설움을 시 종손 제에게 보여示從孫濟에서 토로했다. 병이 난 뒤 왕의의 집을 지나다가 술을 마시고(病後過王倚飮贈歌) 학질로 100여 일 앓다가 나가니 그 몰골 보고 놀란 왕의王倚가 술과 고기를 대접하였다.

- 장안성 남쪽 하두성下杜城으로 이사하여 초가집에서 살다. 손님 와도 접대할 술이 없어 이웃에게 빌렸다. 아내 양씨 종친이 장안에서 동북쪽 2백 리 떨어진 봉선현(현 섬서성 서포성현) 현령이었는데 그리로 가족 의탁시키고 관리 예찬 시 지음. 그러나 뒤에 찾아가 보니 아들이 굶어 죽었다.

- 747(36), 在长安. 진사과進士科 응시, 불합격. 이림보李林甫 (정계 거물로 제상도 지냄)가 전면 불합격 처리. 이후 두보는 응시하지 않고 지인을 통해 고관들에게 계속 시 보냈으나 응답을 얻지 못했다. 751(40), 연은귀延恩匭에 글 삼대예부三大禮賦를 넣다.

- 752(41), 이림보가 죽자 재상 양국충楊國忠 ( ?~756 여동생이 양귀비)은 이림보가 안녹산을 사주하여 모반을 도모했다고 그의 무덤 파헤친다.

- 가을, 고적, 잠삼, 저광희 문인들과 함께 장안 대안탑(同诸公登慈恩寺塔)에 올라 시 짓기. 두보는 나는 세속을 초월하는 마음이 없어, 여기 오르니 온갖 근심이 솟아오르네(自非曠士懷 登玆翻百憂)”라 함.

- 황실의 사치 부각한 걸작 여인행()人行(753 )을 지음. 자연 묘사가 기가 막히며 중의적 표현했다. 왕실 사치를 고발함과 동시에 궁중에 몸담고 있으니 욕은 할 수 없어 그냥 아름다운 모습 보여주었다. 이태백처럼 쓰지 않았고 둘 다 충족하게 씀.

- 양국충의 정책- 754(43), 장안 일대 2개월에 걸친 장마로 심각한 피해. 양국충杨国忠은 농민의 피해와 흉년을 숨기고자 작물을 뽑아 올렸는데 두보는 시 가을비 속의 탄식秋雨嘆三首으로 현실 고발하였다. 서남부 소수민족 토벌전에 장정들이 풍토병 때문에 기피하자 양국충이 발목에 사슬 채워 동원하기도 했다.

- 755(44), 현종은 두보에게 하서현위河西縣尉 (9품으로 치안 담당) 임명했으나 거부.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府兵曹參軍을 수락하였다. 동궁의 숙위宿衛와 의장 관리로 비교적 한가한 직책이었다. 가족을 맡긴 봉선현 가보니 아들은 굶어 죽었다.

2부 합평

이영옥/ 문영일/ 신현순/ 김대원/ 오정주


김숙   23-05-03 00:58
    
오늘 강의 후기 올립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서 강의 내용을 충분히 함축하지는 못했습니다.  요약한다고 더욱 중요한 부분을 누락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댓글로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정주   23-05-06 13:49
    
이백과 함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위대한 시인 두보!
  꼼꼼하고 세세한 후기에 복습이 즐겁습니다.
  이백은 두보보다 11살 연상인데도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여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고  해서 훈훈했습니다.
  중국 왕조에서는 정치사상적으로 유교에 기반한 두보가 높이 평가 되었으나 대중들에게는 낭만주의자 이백이 더 인기가 있었답니다.
 재능은 뛰어났지만 그만큼 굴곡진 삶을 산 두보, 당시 어마어마한 기근에 아들도 굶어죽고....두보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김숙   23-05-08 23:37
    
옴마낫! 바쁘신 우리 반장님 언제 방문하셔서 댓글 남기셨네요.^^
감사합니다.
요즘 저도 뭐가 바쁜지 띄엄 띄엄 이네요.
거듭 감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