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중국문학기행
25. 두보杜甫의 성장과 유랑
- 두보杜甫(712.2.12∼770) Du Fu. 자는 자미子美이다. 이백李白(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이다. 이백이 신동이라면 두보는 노력파라는 평가가 있지만 두보 역시 천재다.
- 두보의 선조는 섬서성陝西省(Shaanxi) 서안西安 동쪽 두릉杜陵에 거주했다. 특히 조부 두심언(杜審言, 杜审言, ?-708)은 당나라 초기 유명 시인으로 선부원외랑(膳部员外郎, 礼部膳部司次官)을 지냈고 「증소미도赠苏味道」를 지었다.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深(高)塞马肥〕”의 천고마비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 두보는 712년(1세), 杜甫生于河南(황하 남쪽) 巩县(鞏縣. 현 巩义市. 河南省省辖, 郑州市代管县级市의 巩县城),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둘째 고모 집에서 성장했다. 3세 때 고모 아들과 함께 역병에 걸렸는데 고종사촌은 죽고 두보는 살았다. 고모가 아들보다 두보를 더 보호하였다. 몸이 허약했던 그는 병치레도 많았는데 고모 덕에 10대 이후에는 황소처럼 건장해졌다. 742년에 고모가 죽자 두보는 “당나라의 의로운 부인(有唐義姑)”라고 칭송했다
- 717년(6세), 河南의 언성郾城에서 公孙(孫)大娘의 무용 「검기혼탈무剑器浑脱舞」을 보고 평생 기억했는데 나중 공손대랑 제자들의 공연을 보면서 어렸을 때 기억을 상기했다.
- 731-734년(20-23세), 游吴越(현 강소성과 절강성) 넷째 숙부와 다섯째 고모부가 이 지역(江寧, 현 강소성 남경)에 거주했다. 와관사(瓦官寺, 晉 武帝 때 건립, 80미터 누각이 유명하다. 位于南京市秦淮区集庆路南侧, 又称古瓦官寺)에서 고개지(顧愷之, 344~406. 동진의 화가)의 벽화 유마힐상(維摩詰像)을 감상했다.
- 735년(24세), 回洛阳应进士考试, 낙방. 736-740(25-29세), 开始了第二次漫游齐赵(齊趙, 현 산동성과 하북성 남부). 평생 친구 苏(蘇)源明(본명 蘇預. 시인)을 만났다.
- 741년(30세), 归东都(낙양). 筑居于洛阳首阳山下土室. 선대의 묘가 수양산에 있었다. 杨氏와 结婚. 장인(楊怡)은 농업관장 보좌직 말단 공무원이었다. 수양산 밑 토굴에서 신혼생활을 했는데 금슬이 좋았다.
- 742-744년(31-33세), 在洛阳. 33세 때 李白(장안에서 쫓겨난 처지)相遇, 二人 畅游齐鲁, 访道寻友, 谈诗论文, 有时也议论时事. 이태백이 궁중에서 쫒겨 난 시절 두 거장이 만났다. 얼마나 좋았겠나? 제나라와 노나라를 돌면서 신나게 놀고 술 먹고. 두 시인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거다.
-장안에서의 곤궁기(35-44세), 746년(35세), 장안长安으로 되돌아갔다. 아버지 죽음으로 경제적인 조건이 악화되었다. 친인척에게 신세 지기, 구걸, 종남산에서 약초 캐어 팔기도 했다. 괄시받은 설움을 시 「종손 제에게 보여〔示從孫濟〕」에서 토로했다. 병이 난 뒤 왕의의 집을 지나다가 술을 마시고(病後過王倚飮贈歌) 학질로 100여 일 앓다가 나가니 그 몰골 보고 놀란 왕의王倚가 술과 고기를 대접하였다.
- 장안성 남쪽 하두성下杜城으로 이사하여 초가집에서 살다. 손님 와도 접대할 술이 없어 이웃에게 빌렸다. 아내 양씨 종친이 장안에서 동북쪽 2백 리 떨어진 봉선현(현 섬서성 서포성현) 현령이었는데 그리로 가족 의탁시키고 관리 예찬 시 지음. 그러나 뒤에 찾아가 보니 아들이 굶어 죽었다.
- 747년(36세), 在长安. 진사과進士科 응시, 불합격. 이림보李林甫 (정계 거물로 제상도 지냄)가 전면 불합격 처리. 이후 두보는 응시하지 않고 지인을 통해 고관들에게 계속 시 보냈으나 응답을 얻지 못했다. 751년(40세), 연은귀延恩匭에 글 「삼대예부三大禮賦」를 넣다.
- 752년(41세), 이림보가 죽자 재상 양국충楊國忠 ( ?~756 여동생이 양귀비)은 이림보가 안녹산을 사주하여 모반을 도모했다고 그의 무덤 파헤친다.
- 가을, 고적, 잠삼, 저광희 문인들과 함께 장안 대안탑(同诸公登慈恩寺塔)에 올라 시 짓기. 두보는 “나는 세속을 초월하는 마음이 없어, 여기 오르니 온갖 근심이 솟아오르네(自非曠士懷 登玆翻百憂)”라 함.
- 황실의 사치 부각한 걸작 「여인행丽(麗)人行」(753 경)을 지음. 자연 묘사가 기가 막히며 중의적 표현했다. 왕실 사치를 고발함과 동시에 궁중에 몸담고 있으니 욕은 할 수 없어 그냥 아름다운 모습 보여주었다. 이태백처럼 쓰지 않았고 둘 다 충족하게 씀.
- 양국충의 정책- 754년(43세), 장안 일대 2개월에 걸친 장마로 심각한 피해. 양국충杨国忠은 농민의 피해와 흉년을 숨기고자 작물을 뽑아 올렸는데 두보는 시 「가을비 속의 탄식秋雨嘆三首」으로 현실 고발하였다. 서남부 소수민족 토벌전에 장정들이 풍토병 때문에 기피하자 양국충이 발목에 사슬 채워 동원하기도 했다.
- 755년(44세), 현종은 두보에게 하서현위河西縣尉 (종9품으로 치안 담당) 임명했으나 거부.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府兵曹參軍을 수락하였다. 동궁의 숙위宿衛와 의장 관리로 비교적 한가한 직책이었다. 가족을 맡긴 봉선현 가보니 아들은 굶어 죽었다.
제2부 합평
이영옥/ 문영일/ 신현순/ 김대원/ 오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