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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급구 (러시아 고전읽기반)    
글쓴이 : 심희경    16-12-10 20:42    조회 : 3,532

<<백발 급구>>

유리 나기빈 (1920-1994)

 

남편이 젊은 애인에게로 가겠다는데, 아내는 화를 내거나 질투하지도 않고 내의와 와이셔츠를 세탁하고 다림질까지 해주며 떠나는 남편을 챙겨줍니다.

이 소설에서 제일 관심을 끈 것은 부인의 반응이었습니다. 한물 간 여자의 어쩔 수 없는 자포자기라고 하기에도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심리...

그것은 주인공 구신과 나타샤가 아름다운 레닌그라드 거리를 돌아다니며 데이트 하는 장면보다도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작가 유리 나기빈은 1920년 모스크바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백군으로 참가했던 사실 때문에 총살당했고 어머니는 남편의 친구였던 사람과 혼인신고를 하고 나기빈을 그의 아들로 입적시키지만 그도 곧 유형을 떠나게 됩니다. 그후 나기빈의 계부가 된 작가 야코프 리카체프의 영향으로 독서 범위가 정해지고 마르셀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부닌 등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모스크바 의과 대학 중퇴 후 소련 국립 영화대학에서 공부했고 첫 단편 <이중의 실수>로 등단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노동>지의 종군기자로 활동한 경험은 <<전선에서 온 사람>>등의 단편집 소재가 됩니다.

전쟁이 끝나자 창작에 전념하며 농촌소설들을 발표하고 자신의 작품들을 시나리오로도 씁니다.

<깨끗한 연못><어린 시절의 책><일어나 가라><금발의 장모><터널 끝의 어둠>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19946월 사망합니다.

유리 나기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거부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는 과도기적 작가로서, 러시아 문학의 방향성을 정립해 가는데 일조했던 작가입니다. 그는 일상적 인간본성의 문제를 작품 속에서 다루었습니다.

 

원만하지 못한 결혼생활과 삶의 활력이 없던 구신은 출장 중에 2류 배우 나타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집으로 가서 그 동안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나타샤에게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집을 나온 구신이 골목에서 자기 집을 돌아보았을 때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그를 보고 있는 아내를 발견합니다.

확장된 모공이 있는 부은 얼굴, 주름진 눈꺼풀, 흐린 눈,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얼굴, 악의 없이, 질투도 없이, 쓰러진 기마병의 시선으로, 총에 맞아 떨어진 새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가련한 아내에 대한 묘사 후의 마지막 문장이 우리들의 토론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으로 어떤 이상한 것을 삼키는 듯한 소리를 내고는 뒤돌아섰다.’

뒤돌아섰다는 것은 아내에게로 뒤돌아선 것이다애인에게로 뒤돌아선 것이다‘. 이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김은희샘을 비롯한 대부분이 애인인 나타샤에게로 간것이라 했지만 저와 몇 사람은 아내에게로 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 이라고유행가 가사에도 있듯이, 사랑이 없었어도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낸 사람사이에는 함부로 팽개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공존함을 믿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론에서 이어진 내용들은

이 남자는 일상을 탈출한 것뿐이지 진짜로 사랑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소설이다.”

사랑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 사랑이 황폐해질 수 있다.”

우리의 뜨거웠던 사랑을 되돌아보게 한다.”

윤리, 도덕과 상관없이 작가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베드사랑만 사랑이 아니다.”

자기의 사랑을 찾으면 가장 자기다울 수 있다.”

사랑은 음식과 같아서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음식을 못 먹어서 말라죽는 것과 같다.” 등등의 의견들이었습니다.

 

여러 번 결혼했던 나기빈은 꽤나 사랑을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김은희샘은 나기빈이 가정을 지킨 남자에 대한 위로로 이 소설을 썼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통속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진정성과 진실함으로 끌고 나간 나기빈의 기본 입장은 사랑 없이는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설 끝부분 구신의 아내 모습에서 마리 로랑생의 시 가여운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심심한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쓸쓸한 여자입니다.

쓸쓸한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병든 여자입니다.

병든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버려진 여자입니다.

버려진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떠도는 여자입니다.

떠도는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죽은 여자입니다.

죽은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잊혀진 여자입니다.

 

손주 보느라 오래 못 나오셨던 이순례샘, 반가웠어요. 다친 손가락도 빨리 낫길 바랍니다. 엄선진샘, 쌀과자 간식 감사합니다. 수업 끝부분에 오신 김정희샘, 점심을 사주셔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영희샘, 티타임 때 커피도 감사합니다.

티타임 후 함께 예술의 전당으로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전시회를 보러 갔습니다. 고흐, 밀레, 고갱, 모네, 르노와르 등등 대가들의 작품 속에서 눈이 호강했습니다.

저는 이름은 생소한 작가지만 윌리앙 부그로의 포위라는 작품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습니다. 놀라울 만큼 정확한 데생으로 천사들에게 포위된 여성을 아름답게 묘사했더군요.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정진희 회장님이 까페에서 음료수를 사주시네요. 하루 종일 얻어먹은 날 이었어요.^^

 

다음 주는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입니다.

 

 


이영희   16-12-11 07:47
    
배우 ...'나타샤'는 필요한 백발을 제대로 구했다는 생각이...^^
  ...' 무관심의 자유'??!! 를 갖고 살고 싶은 남편.
그런 숨막히는 남자를 ... 순순히 자유롭게 놓아주는 아내.
남자는 떠나며  .. 집 밖에서 마지막으로 아내를 올려다보며
한쪽 눈으론 울고..  다른 한 쪽 눈으론 웃었을 것 같은...

예술의 전당의 전시회.
무엇보다 고흐와 밀레를 찬찬히 비교하는 시간이었어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붓터치는 다르지만 ...
같은 구도의 그림이 여기저기 보이는..

휴일..우리  러시아반 님들.. 모두모두 폼나게 보내시길요~~~^ㅇ^
정진희   16-12-16 15:09
    
저도 오랫만에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 시간이었지요..
누구나 처음 사랑을 시작할땐 저리 가슴이 벅차고..
세상이 온통 그대라는 의미로 함축되었던..그 시절이
잠시 그리워졌답니다.
그 뜨거웠던 에너지에 잠시 황홀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