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그리고 참회
3주에 걸쳐 ‘죄와 벌‘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쓸 때 빚 독촉에 쫒기면서 써야했습니다. 먹을 음식도 없고 불 밝힐 양초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조바심과 절망감 속에서 집필해나갔습니다. ‘명작은 궁궐에서 나오지 않는다’ 는 말을 ‘죄와 벌’이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연극을 보듯이 등장인물이 각자 할 소리를 다 하는 대사 속에서 다면성, 다음향적 특징을 보며 여러 인물군상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면적 성격을 가진 ‘도스토옙스키적 인물‘인 이 인물들의 전형은 이후에 쓰여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의 소설에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은 선과 악, 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론으로 무장한 살인자’인 라스콜니코프의 논리적 의지가 선의 상징인 소냐로 인해 무너집니다. 라스콜니코프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소냐의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신성의 승리‘를 말합니다.
읽은 소감으로는
“죄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도 벌이다”
“나도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돕는 라주미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신마저도 우리를 규정하나.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신이 그냥 둘리 없다”
“세상의 소금이 신이 아닌가”
“신은 항상 옳다. 신을 못 느꼈을 때는 이 말을 생각하라”
“사람 층은 층층이 구만 층이다”
“사랑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본성에서 우러나온다”
“전당포 노파가 그렇게도 나쁜 사람일까 의아했다”
“인내심이 필요한 소설이다”
“죄 부분에 집중해서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 속에서 나를 본다”
“우리는 더 슬퍼지려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죄인들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창녀가 된 소냐를 보면서 여성의 성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
“작품속의 사건들 하나하나가 구슬이 되어 하나의 원을 이룬 것 같다”
“회심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랑에 의한 구원을 본다”
등등의 의견들이었습니다. ‘신성의 승리’를 보여 준 작품이어서 그런지 ‘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김은희샘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이 있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이 없다‘ 는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죄를 짓고 벌을 받으면서도 참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는 다른이들은 고통스럽습니다. 왜 부끄러움과 고통은 다른이의 몫이어야 하는지...
지난 주 일요일은 부활절 이면서 세월호 3주기 였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3주기 부활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기억은 부활이다’라는 글귀가 제대 옆에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 성경속의 ‘나자로의 부활’ 부분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죄에 대한 벌을 받고 구원에 이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 앞에, 괴롭지만 기억하고 대면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참회의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죄와 벌을 읽으며 참회를 생각합니다.
김은주샘, 일본 여행에서 사 오신 과자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영희샘이 헐리우드에서 점심을 쏘셨습니다. 맥주까지 곁들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늦게까지 이어진 왕수다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내년에도 러시아 고전읽기반에서 누군가 문학상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이영희샘,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