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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지 출신 도적대장 주원장...황제되다(평론반)    
글쓴이 : 오정주    23-11-07 22:10    조회 : 2,301

기온이 갑자기 뚝 덜어진 오늘,

궁핍한 떠돌이 농부 부모 밑어서 자랐고 먹을 게 없어 탁발승이 되었던 한 소년이 13681월 남경에서 명의 황제가 된 주원장의 이야기와 그의 잔혹한 숙청 방법이 충격적입니다.

가난과 배고픔을 함께 겪은 고향 친구 주원장과 탕화 징키스칸의 후예인 원제국은 초심을 잃고 부와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들고 백성들은 곡괭이와 호미 대신 칼과 창을 들고 홍건적을 만들어 중원을 휩쓸었네요. .... .....피의 역사는 계속 되고...... ......


 34. 명의 역사와 조선

1. 민중반란사의 전통

원나라를 멸망시킨 세력은 도교와 불교를 합친 민간신앙인 백련교(白莲教, 일명明敎) 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이 발단이 된 홍건군기의(红巾军起义, 13511366)는 고려의 종말(红巾军东征高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홍군기의군은 고려에도 침략의 발길을 두 차례나 뻗었다

첫 번째는 1359(공민왕 8) 연말 한 겨울에 4만 여 기의병이 서경까지 점령했다가 이듬해에 고려군이 반격, 엄청난 타격을 입혀 퇴각 시켰다.

두 번째 침탈1361년 겨울에 20만 대군이 침략, 개경 까지 함락당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신할 정도였다. 최영, 이성계 등 명장들이 총동원한 수복전으로 침탈군은 물러났으나 이로 말미암아 원의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려의 자주성은 타격을 입었고 국가의 종말을 앞당기는 형국이 되었다.

 

2. 주원장과 명 제국

궁핍한 떠돌이 농민이었던 부모(朱世珍, 陈氏)를 둔 주원장은 그가 16세 때(1344) 홍수와 대기근에 흑사병으로 부모와 형제와 형수들을 동시에 잃었을 때는 관도 못 구할 처지에 묘지 역시 없던 차에 한 이웃이 묘터를 마련해줘서 관도 없이 그냥 묻었다. 남은 가족들과 헤어진 그는 황각사(皇觉寺)로 들어가자 고빈(高彬) 스님이 글을 가르쳤으나. 거기서도 먹고살기 힘들어 탁발승으로 내몰렸지만 실은 유리걸식 처지로 4년을 보냈다.

동향 출신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인 탕화(汤和)와 어울려 그의 소개로 홍건 기의군의 막강한 지휘관인 곽자흥(郭子兴) 휘하로 들어가 거듭 공로를 세워 그의 양녀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 무렵에 그는 아명을 고쳐 주원장으로 했으며 곽자흥이 병사(1355)하자 그 세력을 고스란히 인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주원장은 13681월 남경에서 명의 황제가 되자 속속 여러 지역이 복속해 왔다.

그해 7, 20만 대군으로 베이징을 향해 북벌에 나서자 원 왕조는 북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당과 송의 한족 통치체제를 복원하려고 성리학을 장려하며, 자신이 겪었던 관리들의 무능과 부정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직접 겪었기에 부패척결에서는 서릿발 같았다.

어렵게 자란 그는 탁발승을 연상하는 광(), (禿) 등과 같은 문자를 비롯해, ()과 발음이 비슷한 칙(), ()와 닮은 도(), ()'과 생(), 자기 성인 주()와 같은 음인 저() 등등의 글자를 작품에서 쓴 문사들을 엄벌하는 문자의 옥(文字獄)을 실시했다.

그가 처단한 인물이 얼추 10만 명이라는데, 그 숫자만이 놀라운 게 아니라 숙청 방법이 세계사에서도 드문 잔혹 그 자체였다.

주원장의 후계인 2대 황제는 손자(건문제)에게 돌아갔다. 그는 숙부들(주원장의 아들들)을 극력 경계했으나 주원장의 4(영락제)이 쿠데타로 남경을 공략(1402), 왕위를 빼앗아버렸다. 142111일 그는 베이징을 명나라의 공식 수도임을 선언하였다.

명 왕조는 비단과 도자기 수출로 명성을 얻은 데다 문학사적으로는 <삼국지 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등 세계적인 걸작들을 남기기도 했다.

 3. 왕양명과 양명학

사상가로 알려진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아득한 후손에다 군인, 학자, 고위관리, 문인들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4개월 만에 태어나 5세까지 말을 못 했다고 한다.

양생설을 계기로 도가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불교에도 심취했으나 성불의 경지에 이르려면 세속과의 연을 단절해야 된다는 데서 가족 지친을 인륜의 도리로 여긴 그로 서는 비인간적인 처사로 여겨 유학으로 다시 돌아섰다. 그래서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익히고자 그는 한 친구와 대나무를 관찰했는데, 친구는 3일 만에, 그 자

신은 7일 만에 병을 얻어 그 방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깨달아 자신만의 진리 인식 방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여기서 유명한 격죽(格竹, 혹은 守仁格竹)이란 술어가 등장했다. 송 제국 때 득세한 주자학이 원 제국을 거쳐 명대에도 그대로 지배이념으로 굳어졌던 터라 출세의 길은 역시 유학이었다.

왕양명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신령스러운 밝음(靈明)’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에 천지만물도 인간의 영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심즉리(心卽理)이며, 그 마음이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경지는 치양지(致良知)이고, 이런 상태에 이르도록 공부하는 것을 치지격물(致知格物)이라

했고 인간 평등론에 입각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창 했다.

 

합평 

*글을 쓸 때 팩트 체크를 잘해야 한다. 위치표시도 주자.

*빈정거리는 투의 문장을 넣어서 글을 풍자화 하자.

*글 내용에서 서로 다른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글의 소재를 품격 있게 잘 선택하여 쓰자.

*월 평 쓸 때 전체적으로 소개해주면 좋다. 

국화 리/문영일/신선숙/이정희/곽미옥/오정주

 

 

 


임길순   23-11-08 16:11
    
그대가 이꽃을 보지 않을 때면  이 꽃과 그대의 마음은 함께 정적으로 돌아간다.
 그대가 이꽃을 볼떼에야 바로 꽃의 색깔이 분명하게 생겨난다.

왕양명의 양명학에 푹 빠진 시간이었습니다.

김춘추/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았다.
....

김춘추의 시가 양명학에서 출발했다는 것도 이제서야 알았어요.

심즉리
세상 모든 존재나 현상은 각자의 마음에 따라 정해진다.

오늘이 입동입니다.

추위도 심즉리 입니다.

반장님 후기쓰시느라  애쓰셨어요
     
오정주   23-11-12 22:01
    
임도사님,  심즉리 잘 설명해주셨군요.
5살 까지 말을 못했어도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다는 ...
추위도 맘먹기에 달려서 감기도 맘 먹기에... 물리치려 했지만
안되더러고요 . 수핼 부족 ㅎㅎ
오길순   23-11-10 07:16
    
오반장님, 열심히도 써 주셨네요.
피의 역사는 계속되고...에서 삶의 의미가 아프게 조명됩니다.
임길순님, 심즉리...^^
마음 속에 꽃을 심어두고 오늘도 살아보기로...^^
     
오정주   23-11-12 22:02
    
오길순 선생님 !!!
여기서 뵈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마음 속의 예쁜 꽃 많이 보여주시길요^^
신현순   23-11-12 12:48
    
뒤늦게 후기를 통해 지난 시간 수업 시간을 동참해 봅니다.
드디어 중국이 우리나라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 시기네요.
마음을 잘 다스려야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일들을 잘 할 수 있음을 다시한번 인식합니다.
임길순 선생님 덕분에 이어서 생각나는 시네요.


나태주/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반장님 후기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구요~~
     
오정주   23-11-12 22:03
    
신쌤
요즘 넘 바쁘시기에
기대를 못했는데 반갑습니다.
우리 자세히는 말고 오래오래 보기로 해용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