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19장 20장 (용산반) 2024년 1월 8일    
글쓴이 : 차미영    24-01-10 16:26    조회 : 3,69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 & 구제에 대하여>

 

202418일 새해 첫 수업은 니체 차라투스트라219예언자’ 20구제에 대하여입니다.

19예언자는 예언자의 예언, 차라투스트라의 꿈, 제자의 꿈 해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은 공허하다, 모든 것은 같다. 모든 것은 끝났다라는 예언자의 예언으로 19장은 시작합니다. 윗글은 니체(1844~1900)가 살았던 19세기 말 허무주의(nihilism) 사상이 만연한 걸 방증합니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청년 니체가 흠모했던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결이 다릅니다. 이십대 니체는 고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미친 듯 읽으며 철학자로 삶을 시작하는데요, 쇼펜하우어에 경도되었던 니체는 차츰 그의 철학에 한계를 발견하며 멀어집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허무주의의 극단 같고요, 그가 말한 의지는 생존을 위한 의지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삶을 고통으로 몰아간다고 봅니다.

반면 니체에게 절대적 진리나 가치는 무의미합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도덕적 규율이나 질서가 부재함으로써 불안하거나 덧없게 느껴질 수 있지요. 그럴 때 흔히 삶이 공허하거나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에 젖은 인간 심리를 간파한 후 한 단계 더 발전해 나갑니다. 니체의 의지는 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향성을 띤 힘 의지입니다. 내 삶이 하찮고 별 볼일 없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조차 우리 생()은 고귀하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삶을 최대한 긍정하는 자세를 니체로부터 배웁니다. 니체는 보편적 진리 탐구보다 자유로운 예술적 삶을 더 선호합니다. 예술만이 삶을 정당화한다고 비극의 탄생에서 말했지요. 니체가 말하는 예술은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그의 철학과 잘 맞습니다. 허무주의를 극복할 방도로 니체가 제안한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 사상이 차라투스트라텍스트에 잘 녹아 있습니다.

예언자의 말에 공감하며 배회하던 차라투스트라는 꿈속에서 무덤과 밤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등장합니다. 무덤의 성을 열 열쇠는 지니고 있으나 아무리 애써도 열리지 않고 대신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문짝을 열어젖힙니다. 활짝 열려진 곳으로 아이의 웃음이 솟아나며 잠에서 깹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제자가 차라투스트라를 생의 대변자라 칭하며 그의 꿈을 해석합니다. 꿈속 무덤과 밤은 기존의 낡은 가치와 사상이며 차라투스트라가 문짝을 연 바람 그 자체라고 전합니다. 열린 공간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어린 아이가 등장하지요. 차라투스트라의 꿈과 꿈의 해석은 예언자의 허무주의 예언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줍니다.

죽음의 관에서 아이와 천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그리스 신화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릅니다. 희망을 제외한 온갖 질병, 증오, 슬픔 등이 담겨있는 상자가 열리는 순간과 묘하게 교차됩니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해 가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삶과 동일하다고 보는 듯합니다.

20구제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진정한 구제 혹은 구원이란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이 글에 나오는 불구자, 거꾸로 된 불구자, 온전한 사람은 누굴까요. 곱사등이나 장님이 요구하는 걸 니체는 냉정하게 비판합니다. 예수가 행한 기적이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못된 구제가 구걸을 키우는 걸 니체가 모를 리 없겠지요. 편파적인 앎과 견해로 무장한 채 스스로 천재라 여기는 기존의 지식인들을 니체는 거꾸로 된 불구자로 부릅니다. 니체는 이들의 정신세계는 원한(르상티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들이 정의(gerecht)라 부르는 것은 앙갚음, 복수(gerächt)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자신의 아이들을 먹어 삼켜야 한다는 시간의 법칙, 그것 자체가 정의다광기는 이렇게 설교했다. (책세상 238) 이 대목에서 그리스 신화 크로노스(Kronos, 농업의 신)가 스칩니다. 크로노스는 제우스를 제외한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집어 삼키지요.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로 권위를 빼앗길까봐 두려워서일까요. 철저하게 복수심으로 맺힌 행동이지요. 근데 니체는 시간을 일컫는 또 다른 크로노스(Chronos, 시간의 신)을 데려옵니다. 두 크로노스 신에 의한 정의는 앙갚음에 불과한 거지요.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게 포착되는 걸 살면서 깨닫습니다. 그 주관적인 시간은 카이로스 (kairos, 기회의 신)가 관장합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논문에서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잘 구분하는데요, 노예 도덕은 과거 그랬었다에 얽매여 다가올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의 도덕인 반면 주인 도덕은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책세상 236)라며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되는 사람이 갖는 도덕입니다. 니체가 말한 온전한 사람은 바로 주인 도덕을 지닌 위버멘쉬 아닐까요. 니체가 진실로 원하는 구제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재우   24-01-11 14:31
    
1.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제2부 19장,20장 수업, 이제  제2부는 21장,22장만 남았습니다.
  니체를 공부하게 되어서 용산반은 행복합니다.
2.차미영 선생님<나가사키에 스며들다>와 신재우<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합평이 있었습니다.
3.2024,1,15, 월요일 12시, 큐슈문학기행 뒤풀이 모임이 용산아이파크몰 7층 장사랑에서 있습니다.
  현재 21명 참석예정, 많은 참석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