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21장 & 22장
1월 22일은 니체 『차라투스트라』 2부 21장 <인간의 지혜에 대하여>와 22장 <가장 고요한 시간>을 배우며 2부를 마무리했습니다.
21장 <인간의 지혜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중의 의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 의지는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 세상을 견뎌내려는 의지입니다. 니체는 궁극적으로 지향할 인간상으로 위버멘쉬를 줄곧 말하지만 현세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유형에도 귀 기울입니다. 그들을 대하는 지혜로운 태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속이려 드는 자를 경계하지 않으며 허영심에 차 있는 인간과 악한 자들에게 연민과 관용을 가질 것과 선한 척 정의로운 척 하는 자들에 섞여 스스로 변장하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렇듯 니체는 여러 인간의 모습과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말하는데 니체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요.
니체의 <도덕의 계보> 제 1논문에 좋음(gut)과 나쁨(schlecht)/ 선(gut)과 악 (böse)을 어원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한 대목이 있습니다. 좋음과 나쁨은 주인 도덕을 지닌 자가 갖는 개념이라면 선과 악은 노예 도덕을 지닌 자에게서 비롯된 거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을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고 그것과 대조되는 관념(보색관계)으로 ‘나쁨’을 만듭니다. schlecht(나쁨)이라는 독일어 단어는 schlicht(단순한)와 같은 말로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원한감정(르상티망)을 지닌 자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 악한 (bōse) 사람을 먼저 생각해내고 자신은 선하다(gut)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21장에서 제시한 지혜들은 위버멘쉬로 나아가기 위해 주인 도덕을 지닌 자의 좋음과 나쁨을 세상살이에 적용한 것 아닐까요.
22장 <더없이 고요한 시간>은 2부 마지막 장으로 3부에서 전개될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사유가 살짝 보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불교의 윤회와 비슷한 듯 다른 듯합니다. 불교의 윤회는 계속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고 사라지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나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될 거라는 니체의 생각은 어쩌면 지독한 니힐리즘에 빠질 법 합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숨통이 죄어오듯 끔찍한데 니체는 왜 영원회귀를 『차라투스트라』의 중심 사유로 내놓았을까요. 니체는 고정된 불변 의 진리에서 벗어나 생성 변화하는 세계에서 힘 의지를 지닌 더 나은 삶을 지향합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 내 삶을 받아들이는 긍정 마인드를 니체는 바라지 않을까요. 니체에게 영원을 산다는 건 지금 현재 바로 여기 나에게 주어진 순간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순간과 영원은 동전 양면에 다름없지요. 빛과 어둠, 명령과 복종처럼.
1부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명령 자체가 복종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세상 77쪽)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줄 아는 자만이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 나갑니다. 복종하는 걸 잊은 차라투스트라에게 필요한 건 바로 명령입니다. 이걸 깨우치는 장면이 22장에 나옵니다. (248쪽)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곁을 떠나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더 견뎌야 할 고독의 시간이 필요해서일까요. 괴테의 『파우스트』 2부 1막 에서 플루토스는 시 짓는 마부 소년에게 “그 고독의 영역으로 가거라. 거기서 너의 세계를 창조하라.”(5696행)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은 새로운 가치를 선보이는 니체 철학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부소년이 고독의 세계에서 꽃 피운 창작활동으로 우리 삶이 더 풍성해지듯 차라투스트라의 고독도 우릴 더 새롭게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어 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