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제7강;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용산반)    
글쓴이 : 신재우    25-07-30 09:29    조회 : 67
1.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부 중<14,15,16 마지막 장>읽기.
2.14장;크나큰 동경에 대하여, 15;춤에 부친 또 다른 노래,16;일곱 개의 봉인.
3.3부의 마지막 세 장을 아포리즘 중심으로 간단하게 정리.
  가.세 장은 차라투스투라(=디오니소스=니체)가 아리아드네(테세우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디오니소스 아내가 되는)에게 하는 철학적 대화로 읽으면 더 
      쉽게 이해된다.
  나.위버멘쉬는  춤을 추고, 웃음 가득, 노래를 부른다. '오늘 여기 있음'을
      기억하고 기뻐한다.
  다.<일곱 개의 봉인 (네, 아멘의 노래)>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 10장, 가르침 1부 22장, 2부 22장, 3부 16장의 마지막 장이다.
  라.성경의 66번째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마.그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기록되어 있어, 아무나 펴 볼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을 뗄 수 있다. 아마도 니체는 자신이 그것을 해제할 
      수 있다는,  16장에서 7가지 긍정의 노래를 펼친다.
  바. 힘의 의지와 위버멘쉬, 영원회귀를 가지고 일곱 개의 봉인을 하나 둘씩 지나며
      차라투스투라는 춤과 웃음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며 행복한 섬으로 
      향한다.
  사.영원회귀는 '오늘'이 똑같이 반복될 것이기에, '의미있는 오늘'로 살아야 한다.
      오늘을 즐겁고 의미있게 살아야 반복되는 내일도 즐겁고 의미있다는 것이다.
  아.매순간 일초라도 그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단독자다.
  마.우리에게 주어진 무거운 삶을 '힘에 의지'에 의해 가볍고, 춤추고, 새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하고, 신체로 춤추며, 정신을 
      새처럼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보라.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몸을 던져보아라.
      사방으로, 밖으로, 뒤로, 너 몸이 가벼운 자여! 노래하라! 
      말은 더 이상  말은 하지 말고!"(384면)
2,김유정 선생님 <해운대 연가>의 합평이 있었습니다.

차미영   25-07-30 12:32
    
신재우 선생님, 수업 후기 감사드립니다. 다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며 이제 막바지에 이른 듯합니다. 고지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 무더위에 니체를 읽는다는 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김응교 교수님과 용산반 문우님들과 함께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 그의 연인 아리아드네의 세계로 날아갑니다. 한 번뿐인 인생에 니체를 공부하고 니체에게서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한다는 건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뜨거운 여름 절정에 니체를 만나며  감상 글 남깁니다.
차미영   25-07-30 12:33
    
다시 니체로 돌아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의 마지막 세 장에는 니체 철학의 핵심이자 가장 난해한 사유, ‘영원회귀’가 담겨 있습니다. 영원회귀란 똑같은 ‘나’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으로 상상만 해도 끔찍한 듯합니다. 왜 니체는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의 탄생에 이어 이 사유를 제시했을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죽음 이후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것과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죽음 이후의 영혼 불멸과도 다릅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육체와 영혼을 나누는 이분법적 전통에 반대하며 ‘지금, 여기, 이 순간’으로 사유를 옮겨갑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나지요. 니체는 서양 전통 철학에 대한 반발 속에서 모든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고자 했으며 그로 인해 현대 철학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이전의 철학이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삼았다면 니체 이후의 철학은 욕망과 몸, 감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춤에 부친 또 다른 노래』에서 “춤추는 자는 귀를 발가락에 달고 있는 법이니!”라는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니체가 강조하는 춤과 노래, 웃음은 중력의 악령처럼 삶을 짓누르는 무거움에서 벗어나 새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귀’는 머리, 곧 이성을 상징하고 ‘발가락’은 신체의 가장 아래 있습니다. 이는 머리로만 사유하는 삶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을 딛고 유연하게 살아가라는 니체의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존재의 심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의 음악을 듣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이어지는 생명과의 대화 장면에서 시계 종소리가 열두 번 울리며 경구처럼 짧은 문장들이 적혀있습니다. ‘깊은’, ‘깊다’, ‘깊디깊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열한 번째 종소리와 함께 “깊디깊은 영원을!”이라는 문장이 나오고, 열두 번째 종소리는 말없이 침묵으로 넘어갑니다. (책세상, 377–378면) 니체는 왜 마지막 ‘열둘’을 침묵으로 남겨두었을까요?
곧이어 펼쳐지는 마지막 장, 『일곱 개의 봉인』에서는 영원회귀를 노래하지만 그 앞에서 니체는 말을 멈춥니다. 그는 말이 아닌 춤과 노래로 실존적 고뇌를 표현합니다. 누구보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피아노 연주에도 뛰어났던 니체는 이 침묵의 순간에 음악적 여운을 실은 듯 보입니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삶, 곧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신화적 존재를 넘어 삶의 비극성과 쾌락, 그리고 생성과 파괴를 동시에 끌어안는 존재입니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적 태도란 ‘그럴 수밖에 없는 것’(369면)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 아모르 파티(amor fati)에 이르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