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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캐릭터의 일관성 (소설반 22.12. 20)    
글쓴이 : 김성은    22-12-23 17:22    조회 : 4,529

겨울학기 3주차 수업에는 여행과 문학기행을 가셨다는 세 분을 제외하고 열네 분이 참석해주셨어요. 그들처럼 이 겨울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추운 강의실에 앉아 수업에 열중해 주시는 선생님들을 보며 작가님은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 인물의 일관성 (앨리스 먼로 「작업실」)

화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여성 작가로서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인데 벼르고 별러서 작업실을 얻게 됐다. 이 유사한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또 대표적인 소설 중에 하나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작품이 있다. 그 소설하고는 조금 접근 방식이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다.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 이런 식으로 개념화 할 수는 있다. 나라는 주동 인물이 있고 그 주인 사내라는 반동 인물이 있는데 주동 인물만이 주인공인 건 아니다. 반동 인물도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소설 같은 경우에는 나라는 화자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그 사건의 핵심에 있는 반동 인물이기 때문에 이 반동 인물은 어떤 부수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가 없고 주인공과 똑같은 무게를 지니는 주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2명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짐을 다 짐을 다 챙겨 내려가는데 맬리 부인이 왔다. 첫날 만난 이후로 거의 못 보았었다. 으레 그러려니 체념한 사람처럼 당황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남편은 누워 있어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부인은 커피병과 머그잔을 넣은 가방을 들어주었다. 부인의 태도가 어찌나 잔잔한지 내게서 분노가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우울이 들어차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직 다른 작업식를 구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볼 생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그 그림—맬리 씨가 걸레와 솔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어설프게. 일부러 어설픈 동작으로 화장실 벽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낑낑거리며 문질러 닦고 서러운 한숨을 토해 내며, 이미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도 웬일인지 절대 성에 차지 않는, 믿음을 배신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짜내고 있는—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는 적어도 기다릴 참이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내 권리라고.

작가가 소설을 쓸 때 내가 쓰는 이 화자가 쓰는 소설이 무엇인지를 독자한테도 밝혀주는 게 좋을 것인지, 그래서 그것을 또 다른 서사의 축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그걸 다 삭제해버리고 그냥 글을 쓰는 상황만 집어넣으며 그 남자와 대결하는 걸 고민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하면 내가 무슨 소설을 쓰고 있는지를 밝혀주게 되면 이 주인 사내와의 대립각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가 이 두 인물 사이의 대립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앨리스 먼로는 어쨌든지 간에 그건 삭제를 해버린 것이다. 그건 보여주지 않은 거다. 이 화자가 지금 이 사무실에서 무슨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삭제해버리고 딱 흔적만 남겨준 거다. 바로 이 상대방의 입(말)을 통해서 작가인 이 화자가 무슨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끔만 하는 아주 깊숙한 서브텍스트로 남겨두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인 사내가결정적으로 이 화자를 쫓아낼 때 근거로 들이대는 게 바로 법이다. 법 그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고 그런 일반적인 도덕 윤리에서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고 자신은 되게 준법적인 사람이고 되게 뭔가 양심 있는 사람이라는 그 자기 정당화 자기변호를 한다. 그 논리로 이 작가인 화자를 쫓아내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왜 이 말을 부인의 대사로 처리를 했을까. “남편은 누워 있어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아마 서투른 작가라면 이 장면에서 이렇게 처리하지 않고 짐을 싸서 나가는 나를 비웃는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주인 사내를 묘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인 선에는 승리한 것이다. 어쨌든 마음에 안 드는 작가를 쫓아낸 거니까. 1인칭 화자가 짐을 싸서 그 사무실을 떠날 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쫓겨나가는 화자인 나를 지켜보는 걸로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앨리스 먼로가 왜 그 남자를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제시를 했을까 “남편은 누워 있어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캐릭터의 일관성이다. 이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변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 자신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뭔가 법을 준수하고 도덕적인 윤리적인 어떤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라는 그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는 거다. 그러니까 몸이 좋지 않아서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 그거는 성공한 게 아니라 실패한 거다. 자신한테는 자신의 그 임차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그 임차인을 잘 감시해서 어긋난 길을 가지 않도록 감시하고 검열하고 선도할 어떤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런데 결국에는 자신은 거기에 실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실제로 실현하지 못한 거기 때문에 앓아누울 수밖에 없는 거다.

그게 바로 캐릭터의 일관성이다. 이 사람이 이 쫓겨나가는 화자인 작가를 지켜보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대신에 바로 이렇게 앓아누웠다는 것이야말로 이 사람이 어떤 캐릭터인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어쨌든지 간에 이 사람은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신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화자가 판단해 주는 게 아니라 독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앓아누움으로써 독자는 이 사람의 끈질김과 집요함을 느끼게 된다. 이 사람이 결코 반성하는 캐릭터이거나 뭔가 음흉하게 어떤 계략을 꾸미는 사람인 게 아니라 진짜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래서 속마음과 얼굴 표정이 다르지 않은 딱 붙은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끝까지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게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