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과 그 시대*
기원전 340년경에 태어난 굴원은 세계문학사에서 동시대 여러 문인 중 가장 위대한 시인! 중국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초나라의 애국 시인! 중국 낭만주의 문학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유학자들이 충신상의 이상형으로 고사나 전설 등에서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애국시인 굴원屈原(기원전 343-278)은 기원전 278년 5월 5일, 돌을 가슴에 안고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백성들이 배를 몰고 가서 굴원을 구해내려 했지만 시체도 찾지 못했다. 멱라강은 상강湘江의 지류로, 호남성湖南省 동북부에 있다.
굴원이 멱라강에 몸을 던지자 주변 어부들이 굴원의 시신이 물고기에 뜯기는 것을 염려하여 쌀을 강물에 던졌다. 중국에서는 단오를 문학의 날로 기린다. 단오에 찹쌀을 쪄서 댓잎에 싸서 먹는 쭝쯔粽子는 굴원을 기리기 위한 음식으로 유래되었다. 용머리를 장식한 배를 빨리 모는 용주龍舟 시합도 벌어지는데 굴원의 시신을 빨리 건져내기 위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날의 풍속은 변질되어 한국, 일본, 월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으로 전파되었다.
왕족 출신에다 걸출했던 굴원의 활동 시기는 초(楚)의 위왕(威王), 회왕(怀王,懷),경양왕(顷襄王) 3대 왕조로, 그 중 특히 회왕 때가 절정이었다. 굴원은 조정에서 법령의 초안 작성 및 선포, 국가의 기밀회의 참석, 사신 접대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회왕懷王(기원전 재위 329-299)의 두터운 신임으로 다른 대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초래했다. 그가 11세 경(기원전 333)에 연나라의 소진의 맹활약으로 강국 진나라와 맞설 6국 동맹(合從)이 성립되었다. 소진의 도움으로 그의 절친 장의가 강대국 진나라의 재상이 된 건 바로 그 이듬해(기원전 332)였는데, 그는 진을 위해서 연횡외교전을 서서히 펼치면서 합종연횡(合纵连横)의 시대가 도래했다.
바로 이런 난세에 굴원은 회왕(怀王)의 총애를 받아 기원전318년(26세)에 조정의 모든 정책 입안과 문서를 맡는 고위직인 좌도(左徒, 보좌관 격)가 되어 일대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기득권 세력에게 미움을 받았다. 실권자였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과는 사이가 그리 매끄럽지 못했는데 왕명으로 헌령(憲令)을 작성하던 중 상관대부가 초고를 보자는 걸 거절하자 더욱 악화되어 참소(谗疏) 당해 28세 때인 3년 만에 파직됐다.
굴원을 망친 사람은 장의다.
당시 정세는 진(장의가 실권자), 초, 제 3국이 강대했는데, 굴원은 합종파(반 진나라 위해 나머지 6국 동맹) 지지자여서 당연히 초는 친제파였다. 그런데 진의 장의는 제나라를 침공할 속뜻을 품고 어떻게든 초-제동맹을 파기시키려고 초나라로 가서 온갖 술책(땅 6백리 주겠다는 등)을 다 동원해서 공략하여 수구 부패 세력에 파고들어 갖은 감언이설로 꼬드겨 왕을 설득해 초의 술책에 휘말려 들어 제와의 동맹 파기.
굴원은 강력 비판했으나 직위조차 없던 처지라 효과 없음. 장의는 귀국 도중 고의로 낙마 사고, 초나라에 가서는 칭병, 두문불출. 초나라 사신은 망신만 당함.
그러나 진은 초에 침공, 땅을 빼앗는 등 온갖 환란을 겪게 만듬. 엄청난 곤경을 치르고서야 초왕이 진과 장의에 속은 걸 알고는 친제파인 굴원을 다시 소환하여 제나라 특사로 보냈다. 이를 묵과하기 어려웠던 진은 다시 초나라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며 빼앗았던 땅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하자 초는 그보다 배신자 장의를 보내라고 하여 세 치 혀의 힘만 믿는 장의는 다시 초로 향했고, 그는 바로 구금, 처형을 앞두게 되었다.
그냥 죽을 장의가 아니다. 그는 왕의 총희(寵姬)인 정수(鄭袖)를 앞세워 구명운동에 성공, 무사히 진으로 떠나버렸다. 장의를 즉각 처형하라던 굴원이 제나라로 사신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장의가 초나라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굴원은 복직, 삼려대부(三闾大夫, 왕족의 사당 관리와 그들의 교육 담당)가 되었으나 이미 실권에서는 멀어졌고, 초나라는 서서히 친진파들이 득세해버렸다.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진 소왕(秦昭王)은 초나라 왕녀와 혼약을 맺자고 유인책을 써서 초 회왕을 진으로 초치했다. 굴원은 이를 극구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근상, 왕자 자란, 총희 정수 등의 말에 따라 회왕은 진으로 향했고, 굴원은 북방으로 첫 유배를 당했다. 파직에서 첫 유배 전후의 심경을 담아낸 작품이 <석송(惜誦)>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忠何罪以遇罚兮, 亦非余心之所志(충하죄이우벌혜 역비여심지소지)
行不群以巅越兮, 又衆兆之所咍(행불군이전월혜 우중조지소해)
纷逢尤以离谤兮,謇不可释(분봉우이이방혜 건불가석) / 謇, 더듬거리다, 정직하다,
어렵다는 뜻.
情沉抑而不达兮,又蔽而莫之白(정침억이부달혜 우폐이막지백)
충직한 사람이 무슨 죄로 벌을 받는가/내 마음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어라/행동이 뭇 사람과 달라 실패하고/또 뭇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어라/갖가지로 문책당하고 비방을 받아/아아 변명조차 할 수 없어라/진정이 억제되어 전해지지 않고/또 가려져 분명히 밝힐 길 없어라.
(장기근.하정옥 역저, <굴원>172-258쪽.)
굴원은 「이소離騷」(근심을 만나다)라는 장편시를 통해 분노와 실망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우선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출생에서부터 서술하여, 조국과 군왕을 위해 고대 성왕聖王처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는데, 소인들의 참소에 의해 왕에게 버림받은 한이 끊일 줄 모르게 됨을 노래한다. 한 맺힌 그는 창오산蒼梧山에 있는 고대 성군인 순舜에게 가 자기의 번민을 호소한 뒤,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해 줄 사람을 찾아 천상 세계를 방황한다. 천제天帝의 왕궁 앞에 이르렀으나 문지기는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자, 그는 실망하여 여신들을 찾아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유사流沙, 적수赤水, 부주산不周山에서 서해로 방랑하였다.
<합평> 이명환/이영옥/설영신/소지연/정민디/정아/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