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부 3장
<연민의 정이 깊은 자들에 대하여>
7월 10일 <<차라투스트라>> 두 번째 시간에는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연민 혹은 동정에 관한 니체 생각을 배웠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머리말 3절 18행에서 이미 연민을 언급했습니다.
“연민이란 사람을 사랑했던 그가 못 박혀 죽은 그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연민의 정은 결코 십자가형이 아니다.” (책세상 19쪽 18~19행)
윗글은 2부 3장에서 말하는 연민의 핵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니체에게 연민은 기독교 교리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니체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원죄를 지닌 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신 중심의 기독교 사상을 비판합니다. 기독교에서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랑은 연민이며 이때 신이 베푸는 연민과 차라투스트라가 베푸는 연민은 다릅니다.
니체는 심리학자처럼 연민을 베푸는 자와 받는 자의 이면까지 세심하게 들여다봅니다. 연민을 받는 인간은 스스로 나약하다고 생각하며 타자로부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자신에게 연민을 베푸는 자에게 고마워하다가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복수심과 원한 감정까지 갖기도 합니다.
연민을 베푸는 자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자신이 베푸는 자들이 겪는 수치심 때문에 자신도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146쪽 17행~19행)
교수님께서 일본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에서 만난 몇몇 깨어있는 일본인들이 느끼는 수치심은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렇듯 수치심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 다 갖고 있는 듯합니다.
니체는 수치심이 인류의 역사라고까지 합니다. (145쪽 16~17행)
기독교 교리에서 베푸는 연민은 인간 의지를 약화시켜 노예 도덕에 얽매인 채 살아가게 합니다. 니체는 바로 이런 연민을 비판하며 극복해야 할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말하는 연민은 힘 의지를 지닌 위버멘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베푸는 감정입니다. 여기서 연민은 연민을 넘어선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연민은 슬픔에서, 사랑은 기쁨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고뇌하는 벗이 있다면 딱딱한 침상, 야전침상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148쪽 7~8행) 이 대목에서 <<데미안>>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전쟁 중 부상을 입고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싱클레어 옆에 데미안이 있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 무의식속에 있는 자기 같습니다. 포화가 쏟아지는 전쟁터 침상 곁에 다가온 데미안이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벗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리아(Philia)는 동등한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의 품성이라고 말합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니체 역시 대등한 관계에서 사랑과 우정이 싹트며 위버멘쉬로 고양될 수 있다고 봅니다.
Plus) BTS 노래를 감상하며 니체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을 추동하는 두 신의 특징,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살펴봤습니다. 서로 대립되면서도 상호 보완하는 관계이지만 니체는 도취 애욕 광기 폭력으로 상징되는 디오니소스 신이 더 근원적이라 보며 예술만이 우리 삶을 정당화 한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