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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문학기행 제30강 구양수의 삶과 문학    
글쓴이 : 김숙    23-07-12 00:28    조회 : 2,615

30강 구양수의 삶과 문학

1. 구양수欧阳修(10071072)

구양수는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이며 만년의 호는 육일거사六一居士. 그는 부친의 나이 56세 때 면주绵州(今四川绵阳)에서 늦둥이로 태어났다. 부친은 구양수가 세 살 때 타계(1010)했다. 어머니를 따라 수주(湖北随州)의 막내숙부(欧阳晔)에게 가서 어렵게 생활했다. 숙부 구양엽은 정직한 관료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조카 양수에게 인성과 초보적인 교육을 하게 했고, 한편 큰 영향과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구양수는 주로 독학했는데 당나라 후기부터 유행했던 유미주의나 송나라의 지나친 규범적인 태학체太學體보다는 고전적인 풍미를 지닌 한유의 학문과 사상을 선호했다. 17세 때(1023) 처음으로 수주随州의 지방 향시에서는 두 번 연거푸 낙방하였다.

고관(서언, 胥偃. 나중에 구양수의 장인이 됨)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계기로 그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다. 수도 개봉으로 가서 응시 족족 수석 합격한 데 이어 23세 때는 진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스승의 딸인 서 씨와 결발부처结发夫妻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첫 부인은 난산으로 죽었고 장자였던 아들도 어렸을 때 잃었다. 이에 구양수는 삶의 무상함을 느꼈다. 두 번째 아내(杨夫人) 역시 명문가 집안의 영애로 부부의 정이 무척 깊었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시인은 그 그리움에 겨워 첫 아내와 둘째 아내를 가족묘지(江西省吉安市永丰县沙溪镇凤凰山上)에 안치했다. 장년이 지나 세 번째로 결혼하여 후손을 얻었으나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고 한다.

문재文才를 타고 난 구양수는 가난했던 성장기를 거쳤지만, 입신양명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부패한 권력층을 두고 볼 수 없어 개혁파였던 범중엄范仲淹(989-1052)의 정책에 적극 동조, 개혁파 정치인이 되었다. 범중엄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선우후락(先憂後樂. 先天下之憂而, 後天下之樂而樂歟의 준말)이란 명언을 남긴 강력한 개혁파. 그는 대민봉사와 국권 수호를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린 데다 많은 업적도 쌓았기에 좌천과 승진을 거듭한 인물이다. 황후(郭皇后)의 폐립 문제로 재상(呂夷簡)과 대립했을 때 구양수는 자신의 직책과 관련도 없었건만 범중엄의 편을 들다가 이능(夷陵, 今湖北宜昌) 현령으로 좌천당했다.(1036) 

2. 기발한 창작 방법론

창작방법론에서 가장 유명한 삼다三多, 多看, 多做, 多商量을 내세운 인물이 바로 송의 구양수이다. 출처는 송의 평론가 진사도陈师道(1053-1101)후산시화后山诗话. 이 저서는 여러 문인의 작품이나 인물평을 단편적으로 짤막하게 기록했는데 그는 영숙위위문유삼다: 간다, 주다, 상량다(永叔谓为文有三多: 看多, 做多, 商量多也)”라고 한 게 전부인데, 영숙이란 구양수의 자()이다. 원문의 뜻을 풀이해보면 이렇다. 구양수가 말하기를, 글을 잘 짓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하라고 하는 게 상식처럼 굳어 있다. 이를 중국에서는 多读, 多立论, 多著述이라고도 한다. 마지막의 상량은 의견교환이나 토론, 흥정 등 다양한 의미까지 확대되는데, 한국의 한 학자(최일영)는 퇴고를 거듭하라는 것으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구양수는 글감을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 세 곳을 거론한 이론을 삼상三上이라고 했다. 귀전록归田录2권에 나오는 삼상三上에서 그는 글을 구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말 위에 탔을 때, 침대에 누웠을 때, 화장실에 앉았을 때余平生所作文章, 多在三上, 乃马上, 枕上, 厕上也라고 했다.

이 말을 현대식으로 옮기면 말 위에 탄 건 이동할 때 타는 모든 것을 두루 포함하는 것으로, 외출이나 여행 등이다. 침상은 꼭 침대에 누웠을 때만이 아니라 한가하게 쉬는 시간 전체로 앉거나 눕거나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 측간에 앉았을 때는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컨대, 목욕할 때나 혼자서 어떤 일을 할 때도 해당할 것이다.

이 글은 독서법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앉은 정좌로는 경서나 역사서 등을 읽고, 누워서는 소설(문학 등 잡서), 측간에서는 짤막한 시 등속을 본다(平生惟好读书, 坐则读经史, 卧则读小说, 上厕则阅小辞)라고 했다. 이어 측간에 갈 때는 꼭 책을 끼고 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읊는다고도 했다. 이것 역시 현대식으로 풀자면 측간이 좌변식으로 편리해졌기 때문에 어떤 독서도 다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창작을 위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읽고, 쓰며, 구상과 퇴고를 거듭해야 한다는 뜻이다.

 3. 공무사한 처신

  그의 통치 철학은 너그러우면서 간소한 정치(관간寬簡)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治民如治病) 지방관직으로 떠돌아다닌 지 4년 만에 구양수는 예부礼部 주고관主考官 진사시험을 주관(1057). 그는 유미주의적인 고문체나 궁정문체인 태학체太学体가 아닌 평이한 문체를 선호했다. 그 결과 구양수는 소식苏轼과 소철苏辙 두 형제와 증공曾巩 등 인재들을 등용시킨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공정서성이 빚은 실수담도 유명한 데 인종이 그를 신뢰하여 잘 넘길 수 있었다. 이런 체험이 어쩌면 그로 하여금 왕의 현명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4. 그의 작품 들

- 정치사의 명문 붕당론朋党论( 1044) 충성과 신의, 명예와 절조를 강조. 참된 붕당을 중용해야한다고 주장함.

- 취옹정기醉翁亭记(1045)는 절경인 낭야산(安徽省滁州市琅琊区西南约5公里) 계곡에다 지었던 두 정자(醒心亭, 醉翁亭) 중 뒤의 정자를 읊은 명편으로 평가 받는다.

- 사형수의 가석방에 대해 논함(纵囚论): 바람직한 정치란 기이한 것(인기전술 등)을 세워 높이지 않아야 한다는 충고다.

- 추성부秋声赋: 52세 때(1059) 그는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인생무상감을 떨칠 수 없었던 심경을 작품으로 남겼다. 부체賦體는 대구나 압운 등을 활용하나 그는 산문투로 자신이 선호하는 평이한 표현을 택했는데, 이런 그의 부를 문부文賦라 부른다.

자연의 섭리가 인간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것은 음양오행을 거쳐 우주 섭리까지 인생 일대가 다 들어있다. 그래서 명문이다.

평소에 구양수는 왕안석의 개혁에 찬성하여, 증공의 천거를 받고 그를 등용시킨 장본인이었. 그런데도 막상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그 부작용들이 생김과 동시에 기득권층들의 반발이 여간 아니었다. 결국 그는 조용히 사직(1071)하였다. 영주(颍州, 安徽省阜阳市颍州区)로 낙향, 이듬해에 64세로 타계했다.

수필 합평: 이명환/ 문영일/ 설영신/ 하광호/ 김유


김숙   23-07-12 00:41
    
중국 문학기행 제30강 구양수의 삶과 문학 수업 후기 올립니다.  혹시 복습 하시는 분 계실까하여 이야기 하듯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순서는 교수님 강의 순서와 조금 바꾸었습니다. 연대기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댓글로 토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곽미옥   23-07-15 12:11
    
김숙 선생님~ 후기를 읽으니 새삼  구양수의 삶과 문학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그의 기발한 창작 방법론은  글을
    쓰는 문학인들에게는  중요한 교과서일 것 같아요.  삼다 (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꼭 저에게 필요한 진리라
    정신 차려야겠어요.  후기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오정주   23-07-15 14:53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구양수가
처복이 없었고 고통받았던 것은 몰랐었네요.
  자식 잃은 슬픔도 컸네요.
  다독,다작,다상량 은 영원한 진리임을
다시한번 공부했습니다.
세세한 후기 감사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