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증언』
9월 11일 가을학기 첫 수업시간에 김응교 교수님께서 신간 『백년 동안의 증언』을 일일이 나눠주셨습니다. 9월 2일 도쿄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발표하신 교수님의 논문 <백년 동안의 증언 - 한일 작가 시민의 증언>과 관련된 <제노사이드와 역사 부정론>이 강의록 제목입니다.
제목부터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제노사이드(genocide)의 사전적 정의는 “the deliberate and systematic destruction of a racial, political, or cultural group”입니다. 단순히 저지른 대량학살이 아니라 특정 민족, 인종, 정치, 문화적 집단을 겨냥하여 가해지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파괴 행위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올해는 간토 대학살(1923년 9월 1일)이 발생한 지 백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학술대회에서 마에다 아키라 교수는 제노사이드를 네 가지로 나누어 규정했다고 합니다.
첫째, 식민지 제노사이드로서 갑오농민전쟁, 의병운동, 3.1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집단학살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 대지진 제노사이드로서 대지진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재해를 이용한 학살입니다.
셋째, 코리안 문화 제노사이드로서 조선말 사용 금지, 일본 이름 강제, 문화재 약탈 등으로 이어집니다.
넷째, 기억의 제노사이드로서 이것은 역사 부정론, 증거 부정론, 학살 부정론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간토 학살 100주기를 기억하며 출간한 『백년 동안의 증언』을 오늘 하루 꼬박 다 읽었습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간토 대지진과 제노사이드에 얽힌 비극 현장으로 데려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교수님께서 이십년 넘도록 발로 뛰며 답사하시고 기록하신 귀한 자료와 고견에 말할 수 없이 감동했습니다. 개인적 편견과 집단적 차별을 넘어선 혐오와 국가폭력으로 일어난 참극을 우리는 제대로 정확히 기억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 도쿄와 간토에 대지진이 일어난 그 날 오후부터 조선인들이 화재를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탄다며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일본 지배세력은 퍼뜨렸지요. 자연재해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힘없는 조선인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년 동안의 증언』에 쓰보이 시게지의 <15엔 50전> (40~53쪽)이란 장시가 소개됩니다. 십오엔 오십전을 일본어로 ‘쥬우고엔 고주센’이라 하는데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파시즘의 집단 광기가 무차별 살육으로 이어지는 비극 앞에 한없이 슬퍼집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솟구치지만 시인은 독자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나직이 당부합니다.
“서사시적 정신이란, 어떤 현실적인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어떤 어둠도 밝혀내는 광원을, 현실과 서로 관련지어, 그것과 격투하면서, 시인 자신을 주체로서 창조하여, 장치하는 정신이다.” (72~73쪽)
시인이 말하는 서사시적 정신을 누구보다 훌륭히 이루어내시는 분이 김응교 교수님 아닐까요. 『백년 동안의 증언』은 혼돈과 무질서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순전히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세련되지 못합니다. 교수님의 저서를 읽으면 증오와 반목을 넘어 올바른 역사 인식에 가 닿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결을 거슬러서 역사를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발터 벤야민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했지요.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