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의 수치심
6월 10일 루쉰의 『아Q정전』 4장~9장까지 읽고 마무리했습니다. 아Q의 정신 승리에 관한 서사가 전반부 핵심이라면 4장부터는 아Q의 연애와 생계문제, 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이 슬프도록 해학적으로 전개됩니다. 마지막 9장에선 그의 죽음을 목도하는 군중 심리까지 씁쓸하게 묘사됩니다.
4장 ‘연애의 비극’에서 아Q는 자오 나리 댁의 유일한 하녀, ‘우어멈’에게 애정공세를 펼치지만 자오씨댁 가족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 감당하기엔 과도한 벌금을 물어야했으며 앞으로 자오 나리 댁의 문턱도 넘지 못하도록 사죄를 강요받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수군거리며 그를 의식적으로 피합니다. 당장 일거리가 떨어진 아Q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서러움과 고통마저 겪습니다. 그가 우어멈에게 접근한 건 3장에서 희롱한 젊은 비구니로부터 “대(代)나 끊겨라, 이 아Q놈아!”란 절규에 가까운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아서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야겠다는 아Q의 욕망이 우어멈에게 향한 겁니다. 이마저 실패로 돌아간 후 아Q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정수암의 무밭에서 무를 훔치기도 합니다. 생존과 번식을 향한 아Q의 근원적인 욕구와 욕망을 4장과 5장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극도로 절박한 상황까지 내몰렸던 아Q는 6장에서 도둑질로 돈을 모아 이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옷감이나 물품을 싼 값으로 팔아넘기며 잠깐 환심을 사지만 좀도둑에 불과한 그의 검은 행적은 오래 가지 못하고 탄로 납니다. 이제 그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건 지탄 받아야 마땅합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지혜는 늘 고갈된 듯 보입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관한 아Q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혁명은 반란이며 고통을 안겨줄 뿐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던 아Q에게 혁명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자신을 멸시하던 주변인들의 겁먹은 반응에 오히려 통쾌해하며 혁명에 가담합니다. 혁명과 관련하여 깊이 사고하고 고민하는 것과 거리가 먼 아Q는 지극히 자기중심적 행동을 취할 뿐입니다. 원한에 맺힌 감정을 터뜨리고자 혁명에 합세하는 제스처에 불과합니다. 이마저 ‘가짜양놈’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 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아Q에게 점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자오씨댁의 약탈범으로 몰리며 체포되고 맙니다. 범인이 아닌데도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총살형에 처하고 말지요.
아Q의 허망한 죽음을 보면서 언제 어디서든 배제당하고 추방당해도 상관없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스칩니다. 법이 있다고 하지만 그 법은 그들 너머에 있습니다. 법의 보호를 절대 받을 수 없는 비극적 존재,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닌 존재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린 듯합니다.
9장 대단원에서 아Q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세 장면이 있습니다. 글자를 쓸 줄 몰라 당황하는 장면, 대신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하지만 제대로 그릴 수 없는 장면, 조리돌림 당할 때 노래 몇 소절도 부르지 못한 장면에서 치욕을 느낍니다.
스피노자는 치욕과 수치심을 구별합니다. 치욕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관련된 슬픈 감정에 속하는 반면 수치심은 부끄러운 자신의 행위를 깨닫는 감정입니다. 아Q는 언제 수치심을 느낄까요. 형장으로 끌려가는 와중에 몰려든 구경꾼들의 시선에서 마침내 아Q는 깨닫습니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건 결국 자신을 의식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둔감하고 예리한’ 구경꾼들의 시선은 사 년 전 산기슭에서 마주친 늑대의 시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린비 157면) 마비되었던 아Q를 깨치게 하는 순간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마지막 작품 ⸀망자」(The dead) 가운데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조이스도 루쉰처럼 주인공 게이브리얼의 수치심에 주목합니다.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아내가 볼까 봐 게이브리얼은 본능적으로 빛을 더욱 등졌다.” (민음사 313면)
마비된 상태에선 수치심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타자를 응시하는 깊은 시선에서 비로소 자신의 치욕을 들여다볼 수 있겠지요. 그 순간 깨닫는 정서가 바로 수치심입니다.
카프카의 『소송』 마지막 문장도 떠오릅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문예출판사 284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비참하게 죽어간 K에게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카프카는 말합니다.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 부끄러운 감정, 치욕은 언제든 꿈틀거립니다.
루쉰은 아Q를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예근성이 내면화된 나약한 인간으로 철저하게 망가뜨립니다. 아Q란 인물의 정신 승리에 구경꾼들의 심리도 함께 있습니다. 그도 구경꾼도 어리석은 민중의 단면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에게 드러난 언행 또한 군중 심리에 따른 정서 모방에 지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무지를 깨달아 가는 순간순간이 우리 인생 여정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