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마지막 날은 판교반 수필 수업과 함께.
오늘 수업은 지난 시간에 제출한 작품들에 대한 공통 합평으로 문자표에 대한 강의로 시작되었다.
<겹따옴표 vs. 홑따옴표>
“ ”: 직접 말하는 것
‘ ’: 간접 화법 표시 / 생각할 때 / 강조할 때 / 표준어는 아니지만 말맛을 위해 쓸 때 /인용할 때 / 제목으로 유행가 제목이나 가사 등 잘 알려진 글을 쓸 때
<겹낫표 vs. 홑낫표>
『 』, 「 」: 예전에 새로조판이나 일본책에서만 사용했으나, 요새는 겹 따옴표 대신에 쓰기도 함. 기능은 따옴표와 같음. 한국산문에서도 저자 프로필에 저서명을 표시할 때 『 』를 쓰고 있음.
이어서 교수님이 준비하신 ppt로 수업이 이어졌다.
<글쓰기의 도구는 언어>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며 세상을 구성한다(교수님 말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비트겐슈타인).
고로 구사할 수 있는 어휘(낱말) 수가 많아야 한다.
*책에 모든 걸 설명하지 말아라(안톤 체홉).
글로 다 말하지 말아라. 독자를 무시하지 말아라.
*작품을 길게 쓰려면 단어 수를 늘리지 말고 내용을 늘려라(안정효).
<이론을 안다는 것>
*글쓰기 이론을 습득하는 것은 캄캄한 밤중에 등불을 켜는 일.
환한 대낮같이 밝은 이론은 되레 해롭다(식자우환).
→ 등불이 있으면 최소한 웅덩이에 빠지지 않고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다. 시행착오를 줄인다.
<말과 글의 불일치>
*한글, 국어의 위대함은 말과 글을 일치시킨 데 있다.
*조선시대 이전의 학자들은 사유(생각, 궁리, 상상)는 우리말로, 기록은 한문으로 했다. 반대로 읽는 사람은 한문을 보고 생각은 우리말로 바꾸어서 했다.
*김만중(1637-1692)은 어머니가 보시라고 유배지에서도 ‘사씨남정기’, ‘구운몽’을 한글로 썼다.
‘우리말을 내버리고 남의 나라 말로 시와 글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꼴과 같다.’(‘서포만필’ 중에서)
*몽테뉴의 ‘에세’, 단테의 ‘신곡’도 라틴어가 아니라 당시 작가가 살던 나라의 언어로 작성되었다.
*문자와 사유의 불일치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한다(교수님 말씀).
어떤 언어의 틀에 갇혀있으면 생각이 부자연스러워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고, 창조성이 부족해진다.
p.s.: 수업 초반에 나온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
글에서 사람 이름 다음에 굳이 ‘씨’나 ‘님’ 등 존칭을 남발하지 말자.
예) 만화가 허영만은~(O) / 만화가 허영만 씨는~(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