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신간소개
  어두운 길이 더 환하다 |최선자    
글쓴이 : 웹지기    20-10-29 08:29    조회 : 5,061
.


책소개

 

어두운 길이 더 환하다는 동서문학상 금상을 수상한 최선자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그의 작품집은 문장이 정확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민의 정이 있으며, 유머 센스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고난한 인생을 이겨내고 체험한 삶의 지혜를 서술한 인생의 기록이며 가족의 사랑을 담고 있다.작가는 자식을 다 성장시켜 사회로 내 보내고 남편을 잃었을 때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지만 학업을 시작하면서 글을 만나고 다시 생의 활기를 찾는다. 글은 자신을 다독여 준 존재이다. 이 수필은 작가의 회고록이자 성장기이며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책이다.가족에게 상처를 받고 힘들었지만 결국 자신을 일으켜준 건 가족의 사랑이라고 항변하는 이 책을 요즘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책속에서

 

P. 24

긴 세월 잠들지 못했던 슬픔의 현이 잠들었다. 피 흘리던 상처가 아물어 간다. 흉터는 옹이로 몸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의 성취감은 정상적으로 진학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졌다. 손녀가 학교에서 우리 할머니는 작가라고 자랑했다는 말을 듣고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릿길이 된다고 믿는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열정이라는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든 나만의 집. 그 안에서는 늘 꽃이 피고 새가 운다. 육체는 늙어 가지만 마지막 날까지 내 영혼은 주름 지지 않을 듯하다. -<환승역에 서다>

 

P. 87

촛불은 단순히 밝음이 아니다. 호롱불을 켜고 살던 시대에는 밝기로도 으뜸이었지만, 어찌 불빛만으로 촛불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초는 온몸을 태우며 불을 밝힌다. 뜨거움을 참으며 울고 있는 듯 눈물처럼 촛농이 흐른다. 한갓 소모품에 불과하지만 촛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장남이었던 동생도 촛불 같은 존재였다. 온몸을 태워 형제들의 길을 밝혀주고 떠났다. 부모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기에 어린 자식들과의 이별은 더 고통이었으리라. 동생에게 장남의 멍에는 천형과도 같았다. 농사일은 팽개치고 술독에 빠진 아버지, 청각장애인이셨던 어머니. 부모님의 짐까지 짊어지고 동생들의 뒷바라지에 정작 본인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촛불>

 

P. 186

할머니 손을 잡고 삼십 분 정도 더 걸었다. 동네에 들어서자 곳곳에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가 눈에 띄었다. 흙탕물이 가득한 논에는 벼가 보이지 않고 논둑이 무너져 내린 데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밭작물들이 떠내려가고 돌담이 무너진 집도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던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동생들도 언니, 누나를 부르며 달려와서 언니와 나의 품에 안겼다. 어린 가슴이 뭉클해지며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남편이 떠난 자리에도 가끔 장대비가 쏟아진다.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마음의 골로 흘러든 빗물. 논둑이 무너지듯 가슴이 무너지고 슬픔에 잠긴다. 모래처럼 퍼슬거리던 삶이 회한으로 쏟아진다. 뼈아픈 화살의 과녁은 어디일까. 모래밭에 숨어 있던 조개처럼 무엇이 얼굴을 들고 나올까. 갈기를 세운 사자처럼 달려들던 흙탕물을 생각한다. 그날 이후 삶은 덤일지도 모른다. 아득한 시간의 강을 홀로 건너고 있다. -<기억의 창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