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시간을 더듬어 다시 걸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십 년을 머물렀다. 발목을 잡고 불화한 시간과 드잡이했다. 문장을 퇴고하는 일은 걸어온 발걸음을 수정하는 일이었다. 길이 문장이 되는 체험이었다.
수필가라는 이름을 얻고 6년.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았다. 덜컥 겁이 났다. 지극히 사적인, 사소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될까. 내 글은 편편이 울퉁불퉁했고 더군다나 울음투성이였다. 부끄러웠다. 출판사에 마지막 원고를 넘기기로 했던 날, 남해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외딴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포구는 밀물로 출렁이며 구멍 숭숭한 개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펄에 박혀 있던 목선 한 척이 떠올랐다. 가슴 언저리가 만져졌다. 내 썰물의 시간, 밀물이 되어 들어와 다독여준 손길들을 생각했다.
그 들물의 기억을 담으려고 했다.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푸른 유리 필통의 추억
길두 아재 / 별똥별 / 적자(嫡子) / 깃발 / 앞돌 / 동박새 / 어린 손님 / 푸른 유리 필통의 추억
제2부 무화과가 익는 밤
태몽 / 어장(漁場) / 애기똥풀 / 단층애(斷層崖) / 택배 할매 / 어머니의 지팡이 / 열무김치 담근 날 / 그녀가 대답해주었다 / 무화과가 익는 밤
제3부 달팽이의 꿈
매발톱꽃 앞에서 / 달팽이의 꿈 / 암매미의 죽음에 부쳐 / 어떤 문상(問喪)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오빠 생각 / 피아노가 있던 자리 / 음력 팔월 스무나흗날 아침에 / 놀란흙 / 휘파람새
제4부 동백꽃 피는 소리
새를 찾습니다 / “우린 날 때부터 어섰주” / 그의 누이가 되어 / 테왁, 숨꽃 / 새 / 하늘말나리 / 숨은 꽃 / 종이컵 그리기 / 거리의 성자들 / 동백꽃 피는 소리
제5부 조율사
교장 선생님과 오동나무 / 감나무집 입주기(入住記) / 15 극장 / “굿바이, 제라늄!” / 저녁의 악보 / 흔적 / 간종(間鐘) / 노랑머리 새의 기억 / 샤갈의 마을에 들다 / 조율사(調律師) / 다시 찾은 유년의 몽당연필
해설 : 대상애와 가족애의 화음 ? 맹문재
책소개
유년의 뜨락에 세워진 한 그루 무화과나무
생명이 내는 ‘울음’에 대한 연민과 공감
박금아의 첫 수필집 『무화과가 익는 밤』은 등단 이후 6년간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았다. 저자가 만난 소소한 일상이 비유와 함축의 언어로 담겨 있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탄탄한 문장력과 견고한 구성이 이끄는 서사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유년에 겪은 모성애 결핍 콤플렉스는 허기의 시간을 거쳐 결혼과 함께 ‘울음’으로 발화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저자를 맞았던 건 개수통에 수북이 쌓여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던 빈 그릇들이었다. 결혼을 살아내자면 공들여 가꾸어 온 과거를 묻어버려야 했다. 탈출만이 살길이었다. 돌도 안 된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업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추락은 계속됐고 만신창이로 끝났다. 결핵으로 다시 집안에 감금되었을 때 유일한 빛이 되어준 것은 글쓰기였다. 밤낮으로 버둥질한 끝에야 매미의 유충과도 같은 깜깜한 시간을 밀어내고 세상 속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비로소 자신 안에서 오십여 년 넘게 울고 있던 ‘울음’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내쳤다고 여겼던 어머니,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존재들도 울고 있었다. 마침내 이 세상은 모든 생명이 내는 크고 작은 ‘울음’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속으로 꽃 피우는 무화과나무처럼, 산 것들이 낸 ‘울음’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뿐, 어딘가에서 분명히 꽃으로 피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확장한다. 저자는 한 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암매미처럼 발화되지 못하고 사라진 ‘울음’을 찾아 쓰기로 한다.
결국 『무화과가 익는 밤』은 박금아가 일생을 통하여 들었던 과거와 현재의, 인간과 자연이 내는 ‘울음’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공감의 총합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