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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과의 동침    
글쓴이 : 곽지원    26-03-27 07:35    조회 : 394

적과의 동침

곽지원

너와의 전쟁은 진작에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변신을 하고 무명씨로 다시 나타난 너는, 그 착각을 보기 좋게 비웃었다.

어느 새벽, 또 저절로 눈이 떠져 뒤척이고 있을 때 들려온 낯선 소음. 휴지통에 넣어둔 비닐봉지 안에서 뭔가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듯, 바스락바스락! 심상치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켜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너! 안경을 안 쓰고 있었기 망정이지(굳이 자세히 보고 싶지도 않았고)! 너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아이였고 몸집도 상당히 컸다.

에프킬러가 조준하자 갑자기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저 멀리 달아나던 너. 그때 보인 너의 다리! 어찌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그 속도에 기가 막혔다.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가 커서 에프킬러를 아무리 뿌려도 속도가 느려지거나 한 자리에서 맴돌지 않았다.

줄기차게 도망가던 너와 끈질기게 쫓아가던 나. 벽면을 따라 방을 한바퀴 돌고 나서야 숨바꼭질의 승자가 정해졌다. 붙박이장 뒤로 달아난 후 꼬박 하루동안 자취를 감춘 너.

그 다음날 새벽, 또다시 휴지통에서 들린 바스락 소리에 나는 불도 안 켜고 벌떡 일어나 이불과 휴대폰만 들고 방을 탈출했다. 네 모습을 보고 싶지도, 달밤에 체조처럼 소모적인 추격전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홈오피스로 쓰고 있는 위층에 올라가 딸들이 올 때만 쓰는 매트리스를 펴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쉬 올 리가 있나! 나의 신경은 내 방을 점령해 버린 너에게로 향하고.

결국 소심한 차선책으로, 휴지통을 멀찌감치 다른 방으로 옮겨 놓고 잠을 청했다. 눈 가리고 아웅. 갑자기 독일 작센 스위스 국립공원 근처 산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 주인이 떠나고 5분도 안 돼서 벽 안에서 들리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소음에 모두 몸이 경직되었던 순간. 다시 돌아온 집 주인의 손에는 초음파로 동물을 쫓는다는 기계가 들려 있었다. 소음을 낸 주인공은 절대 죽이면 안 되는 천연기념물(시븐슐레퍼Siebenschläfer: 산쥣과 동물)이라나.

첫날은 기계 덕분인지 벽 안이 조용했지만, 이튿날에는 다시 들리던 합창.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내 눈 앞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그렇게 이틀간 자연 친화적인 독일인의 삶을 강제 체험했다.

산이 바로 뒤에 있고 공기가 맑은 이 동네로 이사 온 후, 아파트와 달리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다양한 모습과 이름의 너를 볼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어떻게 하면 너를 퇴치할지 비법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창문 틀마다 있는 수십개의 물구멍을 다 막고 나서야 너와의 휴전이 시작되었다.

독일 산장처럼 딱 이틀이 아니라, 매일 지내야 하는 보금자리, 그것도 하필이면 내 방에서 너와 계속 동거를 해야 하나? 사실 네가 눈 앞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그 끔찍한 소음만 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공생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너는 자꾸 존재감을 드러내니 어쩌냐!

며칠이나 지났을까. 독일에서 봤던 그 초음파 기계가 생각났다. 온라인을 뒤지니 더 가볍고 공간도 덜 차지하는 기계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기계를, 아직 해도 뜨기 전에 내 방과 거실 콘센트에 하나씩 꽂고 전원을 켰다. 이제야 마음 편하게 적과의 동침을 할 준비가 되었다


*이 글은 [문예바다] 26년 봄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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