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Y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무한한 희생과 강인한 모성애를 가진 여느 엄마들과는 달리 Y의 엄마는 딸보다도 어린 정신연령을 가졌다. 반찬보다 간식을 좋아하고 사춘기 딸이 입는 옷이나 액세서리를 탐내던 피터팬 어머니는 Y가 18살 때 재혼을 하면서 오래 전 외국으로 떠났다. 어쩌다 귀국하면 딸과 의례적이고 데면데면한 상봉을 잠깐씩 하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무려 석 달이나 머물렀는데 그것도 별로 친밀감도 없는 딸의 집에서 지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런저런 병원 치료는 물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며 친척들을 만났다. 70살이 훌쩍 넘은 어머니는 중년 딸의 핸드백과 장신구를 여전히 탐내며 옛날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는데 Y는 그런 엄마가 얄밉기는커녕 해묵은 원망이 사라지면서 안쓰러움까지 느껴졌다고 했다. 석 달을 함께 지내는 사이 엄마를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게 되었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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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을 5일 앞두고 가볍게 들른 병원에서 어머니는 출국불가 통고를 받았다. 느닷없는 급성 패혈증이었다. 당장 입원하라는 의사의 명령을 얼떨결에 따랐는데 어이없게도 6일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맞춰놓은 틀니도 찾기 전이었다.
“사람에겐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잖아. 엄마의 겉 자아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속 자아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봐….” 장례를 치른 후 친구는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어머니는 영원히 떠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무엇보다도 딸과의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했다.
문득 시아버지가 생각났다. 괴팍할 만큼 까다로웠던 시아버지는 자식들 집에서도 결코 주무시는 법이 없었는데 그땐 어쩐 일이었는지 네 아들딸 집을 모두 다니면서 딱 하룻밤씩 묵으셨다.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행동에 우리는 하나같이 의아해 했는데 모두의 집을 다녀가신 8일 후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런 사고였으니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친구가 말한 ‘속 자아’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이 되겠지만 영혼의 세계를 다루는 이들은 ‘핵심 자아’ 또는 ‘대령’(大靈. Oversoul)이라 말한다. 윤회를 거듭하면서 우리 영혼들은 점차 수준이 높아져 가는데 ‘대령’은 여러 생의 ‘나’들을 통합하는 일관되고 본질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영국의 종교학자 크리스토퍼 M 베이치의 ≪윤회의 본질≫에 의하면, 영의 세계에서 지상으로 올 때 우리는 대략적인 삶의 청사진을 가지고 온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의식은 전생의 기억을 서서히 잊어 가는데 말을 할 때쯤이면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에선 완전히 잊혀진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핵심자아, 즉 대령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생에서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도 이미 윤곽을 정하고 왔기 때문에 예정된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는 행동을 하게 된다. 전생에서 경험한 것이나 영계에서 결정한 청사진의 장면을 만날 때 우리는 익숙한 ‘데자 뷰(deja-vu)’를 경험하게 된다.
재해와 사고 등으로 많은 이들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곤 한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영원한 이별 앞에서 우리는 그저 원통하고 황당한 무력감만을 느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도 Y의 어머니나 나의 시아버지처럼 무의식적으로 마지막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원통한 것은 떠난 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살아남은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이가 평소와 다른 뜬금없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무심코 “죽을 때가 됐나보다.”고 말을 하는데 이는 극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니 가까운 이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다면 ‘갈 때’가 되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무심코 던진 말에 각별한 관심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케이티문예>> 3호 20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