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지다.
조정숙
“중원군의 별이 졌다”
삼삼오오 모여선 조문객들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커다란 거목으로 존재하셨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동행할 꽃상여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마당 한 가운데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집 주위를 두어 번 돌고 대문 앞에서 몇 번 추임새를 마친 상여는 홀연히 신작로로 접어들었다. 97년의 할아버지 생애만큼 긴 조문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이월의 날씨답지 않게 포근했던 그날, 앞산 양지바른 가족묘에 할아버지를 남겨둔 채 우리가족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려 산소위에 어설프게 올라앉은 뗏장을 촉촉이 적셔 다져 주었다.
“날씨도 당신 성품대로 택해서 가셨구나.” 엄마는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는 늘 손님들로 북적댔다. 문을 배꼼이 열고 할아버지 방에 들어서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도 얼른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당신 무릎에 앉히셨다.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조 선생님 손녀딸인가 봅니다. 참 예쁘게 생겼네요.” 하는 이야기가 듣기 좋아 자주 그 방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얼마 못 있어 술상을 들여 놓으러 온 엄마 손에 이끌려 나와야했다.
우리 5남매는 엄마젖이 떨어지면 할아버지 품에서 컸다. 밤이면 오물오물 할아버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랫목에서 주무시는 할머니는 이불 네 귀퉁이를 요 밑으로 접어 넣고 행여 바람이라도 들어 올새라 발도 디밀지 못하게 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둘 셋씩 파고드는 손녀딸들에게 이불, 요를 다 내어주시고 등걸잠을 주무시기 일쑤였다.
예나 지금이나 몸이 약했던 나는 설사병에 자주 걸렸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솥 궁둥이의 그을음을 긁어내 곱게 비빈다음 삶은 계란에 찍어 먹여 주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금세 설사가 멈추곤 했다. 6살 때는 신장염에 걸려 음식조절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음식 탐을 절제하기란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6개월 가까운 날들을 나와 똑같은 저 염식으로 나를 데리고 식구들과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오일장에 가신 날에는 방문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뚫어놓고 밖을 내다보며 목이 빠지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장에서 돌아오시는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안쪽주머니에는 언제나 껌 한통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저녁 내내 씹다가 입에 문채 잠들어 버려 아침이면 떡 진 머리카락을 쥐가 파먹은 양 잘라내야 했다. 그 역할도 물론 할아버지였다.
동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할아버지한테로 이름을 지으러 왔다. 결혼 날짜를 잡아도, 누가 군대를 가도, 동네 이장이 바뀌어도, 모두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할아버지께는 모두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엄마가 시집을 오고 나서도 오랫동안 사랑방에는 글을 배우러 오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글 삯으로 조금씩 가져오는 곡식들도 사양하고 배우고자 하는 인근 동네 젊은이들에게 항상 대문을 열어 놓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모든 이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심지어는 같은 연배의 노인 분들도 공손한 태도를 갖췄다. 그토록 근엄하고 흐트러짐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들에게는 한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하지만 예의를 벗어난 행동에는 “어 허!” 하는 헛기침으로 일침을 놓으셨다.
젓가락을 갖출 때 소리가 나면 안 되고 숟가락 젓가락은 한꺼번에 쥐지 마라. 신발은 늘 가지런하게 벗어 놓아야 하고 입안에 음식을 넣고 말하는 행동은 곱지가 못하다는 등 사소한 일상의 행동들을 일깨워 주셨다. 그러면서도 여자라서 사회적으로 제약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자신감을 심어 주셨다.
고등학교 시절, 시내에 나와 자취를 해야 했던 나는 고3이 되면서는 주말이 되어도 집에를 갈수가 없었다. 늦은 밤 야간 자율 학습을 끝내고 불 꺼진 자취방 앞에 서면 방문 앞에 커다란 보따리가 놓여 있곤 했다.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것이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밑반찬과 라면 몇 봉지, 주머니에 오래 간직 했음직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 그리고 보따리 한 귀퉁이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람은 늘 배워야 한다. 배움 앞에 고생은 행복이니라.”
간간이 손 떨림의 흔적이 있는 듯한 필체로 휘갈겨 쓴 편지는 외로운 객지 생활에 지쳐 갈 때면 든든한 신앙이 되어 주었다.
할아버지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 시대에는 버젓이 본부인을 두고도 작은 부인을 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으셨다. 몸이 약한 할머니를 위해 화로 불에선 항상 약탕기가 보글거리며 한약 냄새를 풍기곤 했다. 6촌동생의 장남을 양자로 들여 아들로 삼았지만 철모르는 아들은 밥만 먹고는 친엄마한테로 달아나 하루 종일 놀다간 밤이 되어야 돌아왔단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아버지는 평생 바라만 보아야 하는 아들이었다. 그러기에 다섯 명의 손자들은 특별한 존재였다. 할아버지 조끼 등은 우리들이 문질러댄 콧물 자국으로 늘 반질댔다고 한다.
사랑방 앉은뱅이 책상위에는 언제나 알이 동그란 돋보기와 벼루, 먹, 붓이 놓여있었다. 그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글을 읽으시고 필사를 하셨다. 나는 그 옆에서 먹을 간다고 온방에 먹물을 튀겨놓기 일쑤였다.
방안에선 할아버지의 시조 읊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오고 나는 댓돌 앞 너른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며 뜻도 모르는 그 음률을 따라 웅얼거리며 어린 나날의 동화를 엮어 나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스승을 만난다. 학교에서, 책속에서, 그리고 살아가는 길 위에서.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두 손이 모아지고 가슴 저릿한 감동을 주는 참 스승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짙게 내려온 눈썹 끝을 올리시며 “어 허!”하는 짧은 단어 속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셨던 그분.
할아버지는 내 마음속의 별이었다.
깜깜한 밤하늘에 반짝거리며 떠 있는 별처럼, 내 영혼이 가끔 방향 감각을 잃을 때면 길을 인도해 주며 온 밤을 새워지지 않는 별이었다.
대단한 정치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난 학자도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종종 다니던 충주 향교 마당엔 유독 흰 매화가 많이 피어났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맨 할아버지가 향교 마당 저쪽에서 나를 부르면 흙장난 하던 손 그대로 달려가 두루마기 자락에 얼룩을 지어 놓곤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올해로 십삼 년째 되었다. 희 매화처럼 고결했던 그 분의 이름 석 자에 손녀딸로 혹여 자국이나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 한 번씩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인자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언제나 그 곳에 서 계셨다.
“어 허!” 하시며.......
<<한국산문>>, <충청매일일보>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