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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비둘기    
글쓴이 : 이정희    12-05-12 10:39    조회 : 4,801
도시의 비둘기
학정 이정희
 우리 집 현관을 나서서 전철역까지는 내 걸음으로 10분 거리다. 아파트 단지 내 공원에 난 사잇길로 걸어가노라면, 후드드드득 비둘기들의 날갯짓이 요란할 때가 많다. 잔디에 나붓이 앉아있는 놈, 구구거리며 이리저리 먹이를 찾아 폴싹거리는 놈, 휙 위로 솟구치다가 내 머리 위에서 곤두박질하며 내리꽂히는 놈 등 고것들의 어지러운 움직임이 내 눈길을 바쁘게 한다.
 아이보리색 투피스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나선 어느 날, 비둘기들의 숫자가 유난히 많고 그 거동도 야단스럽고 재빠른 것이, 아마도 잔디밭에서 벌어진 아이들의 재롱잔치로 먹을거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돌연히 생뚱맞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필 어떤 놈이 내 머리 위에서 똥을 내갈겨 이 새 옷에 떨어진다면? 되돌아가 갈아입고 나와야하나 그냥 가서 얘깃거리로 삼아야 하나.’
 고것들이 머리 위에서 워낙 북새를 놓기는 했어도 기분 좋은 외출에 어찌 그리 빙충맞은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근래 비둘기의 오물이 큰 환경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곳에서 오래 살아오는 동안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후론 제법 차려 입고 나가는 길에 비둘기 떼를 만나면 저절로 그 생각이 떠올라 실소하게 되고, 형제들이 붙여준 ‘사서 걱정하는 여자’란 내 별호(別號)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둘기. 무엇이든 잘 먹는 잡식성에 환경적응력이 뛰어난 새. 귀소본능과 비행능력이 탁월한 데다 성질까지 온순하고 길들이기 쉬워 BC 4,000년경부터 중근동에서 전서구(傳書鳩)로 사육되기도 했던 새. 평화의 상징으로 뚜렷이 각인된 새.
 60년대에 나왔던 이석의 노래 <비둘기 집>은 숲 속 새집 같은 조촐한 오두막에서 오순도순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며 크게 히트했다.
 뿐인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로 시작되는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비둘기들의 서식처가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물론 그 비둘기는 단순히 비둘기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것을 형상화하고 있을 테지만.
강물 같은 세월이 변화시키지 않은 것은 없나보다.
 텃새의 대명사인 참새나 철새의 대표 제비 같은 새들이 자취를 감춰가는 이즈음, ‘비둘기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시의 비둘기들이 증가하고 있다. 시청이나 고궁의 지붕들이 비둘기 오물로 인하여 부식되어 간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더니 이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왜 이렇게 비둘기가 많아지는 걸까.
 우선 생체리듬이 깨졌다는 게 중요한 이유다. 원래 번식기와 비번식기가 따로 있었는데 환경호르몬, 오염물질, 중금속 등으로 그 구분이 없이 연중 번식하게 되었고, 도시의 온갖 음식물쓰레기와 생각 없이 재미로 던져주는 모이로 먹을 것이 지나치게 풍부해졌다. 더구나 자연생태계의 먹이피라미드처럼 천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개체 수를 조절해주지 못하는 데다 오히려 교각 등 콘크리트 구조물이 많아 깃들기가 쉬워졌다. 그러니 그 수가 절로 늘 수밖에.
 어린 시절 멀리 이사 간 친구나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날렵하고 재빠른 비둘기에게 실어 보냈던 그 해맑은 기원(祈願)들. 아스라한 창공으로 멋지게 비상하던 모습을 고개를 뒤로 재끼고 바라보며 날리던 희망과 꿈. 온 동네 잔치였던 초등학교 운동회 날, 점심 후의 나른함에 양 쪽의 승부욕이 어지간히 느슨해진 무렵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청 백 머리띠를 두른 꼬마선수들이 와르르 쏟아져나가 장대 위의 청백색 커다란 종이 공을 콩주머니로 던져 맞히던 경기. 마침내 공이 터지고, 그 속에서 튀어 오른 하얀 비둘기 몇 마리가 펄럭이는 만국기 위를 두어 번 선회하다가 힘차게 날개를 펄럭이며 푸른 하늘로 솟구칠 때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울려 퍼지던 환호와 함성.
 비둘기는 그런 추억 속에서 아직도 선명한데, 우리 공원의 비둘기는 이제 그 시절의 비둘기가 아니다. 날씬하지도 않고 날렵하지도 않다. 뒤뚱거리는 비대한 몸집에 뒤룩거리는 목덜미로 먹이만 좇을 뿐 아니라, 창공으로 재빠르고 사뿐하게 비상할 줄도 모른다. 날개도 퇴화되어 날갯짓만 요란할 뿐 겨우 나뭇가지로 뛰어오르고 내리는 정도의 한정된 범위에서 제 딴에만 부산할 따름이다. 오죽하면 그 사랑스럽고 귀하던 새가 내 옷에 오물을 떨어뜨릴지도 모른다고 속되게 걱정했을까.
 통신수단이 첨단을 달리고 있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비둘기레이스가 열리고 있단다. 우리나라에도 본래의 속성을 그대로 갖춘 비둘기는 물론 있고, 더 멀리, 더 빨리 날 수 있도록 얼마든지 길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의 대명사로 소식의 전령사로 비행속도가 제일 빠른 새로 귀하게 대접받던 비둘기를 도시에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더하여 파아란 가을 하늘에 깨끗한 한 개의 점으로 사라져가던 흰 비둘기는 자취를 감추고, 도시의 공해를 상징하듯 거의가 잿빛 비둘기 세상이다.
 비상할 줄 모르는 살찌고 게으른 도시의 잿빛 비둘기, 어쩌면 수많은 내 자화상 중의 하나일지도.... .
 
                                                                                                                         2009년 <<시선>>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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