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은 언제입니까
봄이라고 해서 모두 아름다운 얘기로만 가득차진 않는다. 안동에서의 어느 봄밤, 하회 물돌이 강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가 교각을 피하려다 수 미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발견되기까지 차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뒤집힌 차 안에서 나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옆을 바라보았다. 운전자 젊은 비구니의 다리가 하늘을 향해 있었다. 논에 물이 대져 있었기에 큰 충격 없이 이마에 난 작은 혹 하나로 마무리됐지만, 거꾸로 처박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던 스님의 민머리는 아직 뇌리에 생생하다.
숱한 세월을 지나오며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MBC ‘무한도전’의 일명 ‘토토가’가 화제에 올랐다. 9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을 한데 불러들여 시청자를 추억 속으로 끌어들인 인기프로였다. 한 친구는 터보가 나왔을 땐 너무 신이 나 드럼 치듯 남편의 등을 수차례 두들겼다고도 했다. 이들 말에 귀 기울였지만 끝끝내 나만 이방인이었다. 당시에 나만 도시 여자가 아니었듯이. 친구들과 공유할 과거의 일부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우울해진 나는 집에 돌아와 그 당시 흔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른 먼지가 쌓인 일기장 대여섯 권과 방명록 두 권이 남아 있었다. 일기를 장식하고 있는 그곳에서의 5년 세월은 내 인생의 봄이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봄이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평온하거나 영화롭거나 보람 있거나. 어쨌든 가장 좋았던 한 시절을 봄이라고 치자. 나는 30대 중반, 안동에 살았던 때를 그렇게 부른다. 남편 직장 발령으로 낯선 곳에 가게 되었을 때의 첫 느낌은 희비가 공존했다. 중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의 안동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였기 때문에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당시 시댁 가풍에 휘둘리던 철없는 외며느리의 해방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덜덜거리는 트럭에 짐을 싣고 이사하던 날은 시월 마지막 날, 그것도 야반도주하듯 한밤에 감행되었다. 시어른의 병세가 위중해서 남편과 아이들은 서울에 남고 나만 먼저 내려가게 되었는데, 가는 동안 몇 번이나 기후변화가 있었다. 맑았다가 비가 오다가 바람이 불다가, 문경새재를 넘어갈 때쯤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차 안의 히터는 작동되지 않아 추웠으며, 뼛속까지 혼자라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 헤드라이트에 비친, 흰 눈이 배경이던 단풍잎은 내 생의 기억을 통틀어 가장 붉고 선명했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차라리 그것은 슬픔에 가깝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스산한 출발과 달리 안동에는 여러 선물이 구비돼 있었다. 무엇보다 서울에 살 때처럼 아파트 평수에 따라 이웃이 맺어지는 상대적 빈곤감이 없었다. 자리 잡은 아파트는 넓고 깨끗했다. 우리 집에서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나뭇가지가 잡힐 것처럼 주위는 온통 언덕과 숲이었다. 어린 두 아들은 도마뱀을 잡아와 함께 목욕을 했으며, 겨울이면 산중턱에서부터 비료포대로 썰매를 탔다. 안동댐과 임하댐, 강물의 지류에서 솟아나온 무시무시한 안개는 5층 베란다까지 점령한 채 아침 10시가 다 돼서야 물러나곤 했다. 나는 특히 그 유백색의 안개에 매료됐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안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 떨군 야생 꽃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의도에 살 때에도 이른 새벽에 한강변을 산책하며 달맞이꽃과 마주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땐 집안 사정이며, 육아며 안팎으로 복잡하고 힘들어서 잠시 도피를 위한 시간이었다면 어느 순간 이곳에서는 오롯이 사물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득 사람들을 사귈 때도 이와 비슷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나는 특별할 것도 없이 그저 그런 삶을 지나왔는데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분으로 내 존재가 끌어올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스님, 도공, 유림의 학자나 화가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자주 강둑을 걸었다. 길들은 아직 거기 그대로 있을까? 우리는 함께 모여 서각과 전각 작업을 했고, 오래된 정자나 고택을 찾아다녔다. 우리 집엔 차방이 따로 있어서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수묵으로 ‘반야헌 문집’이라고 씌어 있는 한지로 된 방명록은 이들이 다녀간 징표다.
나의 90년대는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했다. 도산서원과 유성룡 생가에 핀 매화를 사랑했지만 그보다 나를 각성시켰던 건 거친 폭우였으며, 다시 회귀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실제보다 크게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제 와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 한 번이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커지는 동심원 구조로 내 삶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마지막 외피가 돼 줄 거라는 사실만, 내게는 중요하다.
당신의 봄은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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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0일. 화광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