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그래 장그래, 오늘도 YES!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텅 빈 바둑판은 요염하게 빛나고 그 위로 폭풍전야의 정적이 흐른다. 외나무다리에 선 승부사들은 묻곤 했다. 그곳 망망대해의 어디에 나의 삶이 존재하는가. 이제 나는 칼을 품고 대해로 나가려 한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두 적수는 무심한 눈빛으로 판을 응시한다.” 1989년 조훈현이 국내 바둑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제패를 한다. 만화 ‘미생’은 조훈현과 네웨이핑의 제1회 응씨배 최종국 기보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첫 수부터 마지막 145수가 끝날 때까지 이 작품은 삶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수 한 수 돌을 잇는 우리시대 평범한 샐러리맨의 희로애락을 담았다. ‘미생’은 원작인 웹툰은 물론 드라마와 단행본 만화책 모두 성공을 거뒀다. 장안에 화제가 되고, 윤태호 만화가가 이 작품 덕에 집안 빚을 다 갚았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올 즈음 나는 허겁지겁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장그래’는 이십 대 남자주인공의 이름이다. 어릴 때 바둑에 입문했지만 프로입단에 실패한다. 오갈 데 없이 결국 미숙한 모양새로 사회에 흡수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된다. 바둑판과 세상의 한판은 동의어겠지만 종합상사 인턴이 되면서 겪는 그의 수난사는 곧 나의 지난날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내가 몸담았던 직장은 중소기업 수출입업체였으며, 주 거래처는 굴지의 종합상사들이었다. 무역 서류를 담당하면서 신경은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고, 방대한 업무량에 휘둘렸다. 분, 초를 다투는 생활은 전쟁터였다. 한번은 외국상사와의 계약서가 그만 쓰레기 더미에 쓸려 사라진 일이 있었다. 사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건물은 꼭대기 층에서 지하까지 쓰레기 배출구가 하나로 연결돼 있는 곳이 많았다. 고층건물 지하로 뛰어 내려간 나는 산더미 같은 파지들을 종일 헤적여 가까스로 종이 한 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휴일에도 홀로 출근하여 일에 전념했던 불꽃같은 그 시절을 나는 만화를 통해 다시 만난 것이다. 누구나 화려한 스토리보다 타인이 겪는 고통에 더욱 큰 공감을 나타내는 것 같다.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일 것이다.
만화 ‘미생’ 시리즈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명문장들이 도열해 있다. 틈틈이 인터넷바둑을 즐겨 두는 나는 대국과 해설을 복기할 생각으로 ‘미생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문장들을 필사하겠다는 목적이 앞섰을지 모르겠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드라마까지 섭렵하기 위해 하루 밤낮을 바쳐 첫 회부터 쉬지 않고 보았으며, 지금은 본방사수를 하고 있다. 드라마 13회 끝부분에서 주인공이 내레이션으로 보들레르의 시 ‘취하세요’를 읊조릴 때 완결미는 정점에 이른 듯했다. “늘 취해 있으라... 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그대가 마음 내키는 대로 다만 계속 취하라...그대 방안의 적막한 고독 속에서 그대가 깨어나 이미 취기가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라.”
바둑판에서 두 집을 내지 못해 아직 살아있지 못하다는 미생(未生). 드라마에서는 회사 내 계약직과 인턴들을 비유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지만, 살아내야 할 날이 많은 푸른 청춘들 역시 미생이다. 그들이 허공에 대고 묻는다. “지금은 몇 시입니까.”
주인공 장그래는 살얼음판 인턴 경쟁에서 살아나 계약직으로 고용된다. 정규직이 누리는 권리에서 소외되자 ‘같은 사람이고 싶다’며 독백하는 그의 뒷덜미가 쓸쓸한 잔상을 남긴다. 업무능력이 떨어지지만 ‘판’을 읽어낼 줄 아는 그의 통찰력은 학력이나 스펙이라는 세상 기준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 자신도 정직원이 될 수 있냐고 묻지만 회사의 매뉴얼은 철옹성 같아서 고졸출신은 어림없을 거라고 오 차장이 못을 박는다. 무책임한 위로, 속절없는 희망에 매달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다. 2년 계약직이 사석(죽은돌)이 되거나 그저 파쇄 돼야 하는 문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사의 눈가가 더욱 붉어진다. 따뜻하다.
“정규직 계약직 그런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계속 일이 하고 싶은 겁니다. 내게 허락된 세상에서 우리가, 같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신입사원들이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건 장그래가 곧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신의 한 수는 존재할까?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마다 꺼내보는 회사 기둥벽에 끼워둔 ‘YES’라는 글자. 그런 장그래에게 나는 응원의 메시지를 준비한다. 삶에서 우린 모두 신입사원이며, 어차피 모두 완생이 아닐 것을.
이 땅 아들딸의 분신, 내 젊은날의 초상이여. 장그래, 오랜만에 나는 너 때문에 가슴이 뜨겁다.
2014년 12월 12일. 화광신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