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모의 프로파일
소지연
나에겐 시간이 가도 잊히지 않을 얼굴 하나가 있다. 큰 바위 기슭같이 밋밋한 이목구비를 지녔으나 호젓한 미가 우러나오던 내 큰 고모의 얼굴이다. 길거리에 범람하는 성형미인들이 시들해 보이는 날이면, 나는 불쑥 그 평범하면서도 범상치 않던 얼굴을 떠올린다.
여름방학이 오면, 불볕이 한낮을 달구는 해운대 백사장 위를 우리 형제들은 모래범벅이 되어 뒹굴곤 했다. 부산 살던 큰 고모는 파라솔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찾아내어, 짠 반찬 곁들인 찬합을 내밀기 일쑤였다. 작은 키에 연둣빛 칠 부 블라우스와 포플린 주름치마를 즐겨 입던 큰고모는, 가끔 소리로만 “그-윽” 하는 트림 모션을 만들어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내 강생이들…….”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는, 학창시절 우리들에게 그 구수함만으로도 빼 놓을 수 없는 연인이었다.
그 때, 파라솔 안으로 고모는 잠시 눈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겐 옆얼굴만 언뜻 비친 것은. 차마 그 담담한 눈빛을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큰고모의 아지랑이처럼 먼 이마와 비에 젖은 듯 흐릿한 옆모습은, 어쩌면 호손(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산의 노인’, 그 바위를 닮아 있었는지 모른다.
큰 고모는 매서운 우리 할머니에게서 삼남삼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꽃다운 열일곱에 순박한 집 막내며느리로 시집갔던 그는 가끔 큰 동생 집을 소나기처럼 다녀갔다. 친정에 오면 도인 같은 거동으로 여기저기 일감만 들고 앉았다가, 이틀이 채 안 되어 시가의 형님께로 종종 달아났다.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모친이 버거웠던 그에게, 어려워야할 시집은 며칠이고 쉬어갈 넉넉한 심성들이었다.
큰고모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육남매 중 맨 위라는 특별 순위라서 양보해야 하는 것이 호랑이 할머니의 철학이었다. “제일 큰 사람답게 음식과 침방을 가르쳐 보다 쓰임이 넓게 하려 함이었다.” 나중에 공표한 노인의 변명이 그럴싸했다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 소오오오!”
고모는 가끔 서투른 메조소프라노로 ‘밀양아리랑’의 첫 가락을 뽑아냈다. 애타게 늘어지는 마디마다 설움이 구슬처럼 꿰어졌다. 노래 가락에 덧붙여 마음 넓은 고모부가 눈감아준 것이 있었으니, 음식 솜씨를 실전에 옮기는 사이사이 배워 둔 춤사위였다. 가끔씩 기분이 발동하면 툇마루에 올라 뒷짐을 지고는 기를 모은 버선코를 바짝 꺾어 올린다,
“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 소오우!”
고개를 까닥 거릴 때마다 기름한 옆얼굴을 타고 연지 찍은 새색시 같은 수줍음이 흘렀다. 단풍잎에 물 들은 노을이 멀리 가까이 손짓 하듯 고모의 애수는 보일 듯 말 듯 퍼져갔다. 춤사위가 끝나면 먼 산을 바라보며 “허어!” 헛기침 하던 그에겐, 억겁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슬픔 하나가 더 있었다. 아기자기하기보단 수수한 얼굴의 그와, 기골이 장대하고 무걸 호인격인 고모부 사이에는 인물 출중한 장녀가 있었다. 시집간 이튿날 목숨을 거두어 버린 것은, 맏며느리로 뽑혀갔던 대갓집의 신랑이 천하에 없는 난봉꾼으로 들어나서였고, 마음속 깊이 담아 둔 고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연모의 정을 잊지 못해서였다. 청천벽력에 넋이 나간 내외는 부산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희로애락이 말라버린 고모의 얼굴은 해풍이 훑고 간 바위처럼 삭막했다. 그 때부터 그는 옆모습만 띄우고 마는 마술을 습득하게 된 걸까.
그렇던 큰고모의 얼굴이 환하게 꽃 피던 몇 년간이 있었다. 쌀쌀맞던 모친의 그 나마의 배려로 큰 동생의 여식인 네 살배기 내가 맡겨진 것이다. 장성한 그의 아들은 친정동생 밑에서 기거하며 일을 보게 되었으니, 어쩌면 여기에도 어떤 섭리가 흘렀을까. 예전에 못다 한 정성을 조카딸에게 쏟아 붓는 동안, 고모의 마음속엔 처음으로 모친에 대한 감사가 흘러 나왔다. 나로 서도 유달리 남아 선호사상 분위기가 짙어가던 형제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큰고모의 보살핌을 독차지하게 된 셈이었다. 한편으로 그 때 함께 엮은 어린 시절의 소박한 생활이 후일 내 삶의 다양성에 고귀한 일조를 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음덕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어머니!’ 하면 숙명처럼 큰고모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 어린 시절로의 첫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는 시간이 바로 그와 보낸 날들이며, 고향처럼 남아있는 엄마 냄새가 바로 그의 글 모르는 구수한 얼굴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리라.
육척 거인 고모부가 보름달을 등진 채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던 다음 날, 열 살이 된 나는 호랑이 할머니를 따라 형제들 곁으로 돌아왔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른 또 하나의 이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 때부터 고모는 숫제 살벌한 얼굴로 굳어져야 합당할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호손이 그렸던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라도 돼버린 걸까, 놀랍게도 벼르고 벼르던 친정 나들이를 하던 어느 날의 그의 모습은 담담하고 꿋꿋하기 까지 했다. 조그만 욕망 따위도 자리 잡지 못한 그 낮은 자리엔, 가끔 지나친 슬픔을 승화시킨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정갈한 기품이 흘렀다.
사랑채의 모친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낸 그는, 먼저 찬방으로 들어가 승려의 고깔 같은 수건을 쓴다. 정성스럽게 만들어낸 가자미 유장구이는 손아래 올케 솜씨를 한참이나 앞지른다. 방방이 이불 호청들도 우두둑 갈아 씻어 반질반질하게도 시침해낸다. 발도 씻지 않은 조카들은 마구 그 위를 구르고 사춘기 소녀가 된 옛적의 그 아이는 서성이며 눈을 맞추려 하지만, ‘훠이 훠이’ 애맨 소리를 내며 시집 형님네로 달아나 버린다. 마치 그에게 온 운명을 보완이라도 하듯 고모는 그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치러나갔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먼발치로 뒤돌아보던 그는, 기실은 조카딸을 한 번 더 보러 온 것이었다. 철부지이던 나와 답답이 고모는 그렇게 서로 홀로서기를 하는 듯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랑데부는 연례행사가 되어 갔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홀연히 ‘돌아와, 거울 앞에선 국화처럼’ 모처럼의 평온함을 이어가던 고모는 내가 결혼하여 첫 아이의 엄마가 된 후부터 친정나들이가 뜸해졌다. 해외로 떠나는 조카딸을 희미한 미소로 환송하던 그는, 뒤늦게 혼인한 아들 며느리와 우람한 세 손자들에게 마지막 힘을 쏟기 시작했으리라. 처음부터 지병을 달고 사는 며느리라, 손자들을 자신의 피땀으로 키우는 동안 고모의 뼈는 아스라이 사그라져 갔다 하니, 운명은 마지막으로 큰고모를 동무 삼고 싶었나 보다. 새로운 삶에 여념이 없다 한들, 어찌 잠시나마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었을까. 고모가 병상의 마지막에 불렀던 리스트에는 나의 이름도 있었다는데. 꼽추 같은 허리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는데.
시간을 태운 열차는 멀리 갔고,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의 모델이 되었던 바위마저 풍화작용으로 무너져 내린지 오래다. 바위등성이 같던 고모가 먼 곳으로 사라진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한 번 또 보고 싶은 것은, 계곡 아래 자리 잡은 일자 눈과, 뾰족하지도 뭉툭하지도 않은 코, 그리고 언제라도 헛헛한 트림소리를 낼 것 같은 입이 정겨운, 바로 그 얼굴이다. 그 옆모습은 쓸쓸했지만, 나는 그런 그의 프로파일을 잊지 못한다. 마침내는 한 송이 들국화의 자태로 돌아왔던 큰고모! 그는 덤으로 내가 좋아하는 향기까지 지녔던, 내 순수의 고향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