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이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아. 언니, 오빠. 내가 지금 제일 잘 나간당께.”
아빠의 칠순 때였다. 온 가족이 우리 가게에서 조촐하게 밥을 먹었다. “다 모여!” 하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였다. 있는 고기와 놓인 반찬으로 친정식구들과 조카들의 공복을 채워 주리라 마음먹었다.
수경이는 하나뿐인 내 여동생이다. 세상에 나온 지 여섯 해가 되기도 전에 엄마를 잃었다. 엄마가 떠나자 아빠는 곧장 막내를 이모네 한약방으로 보냈다. 하지만 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거렸고 불과 이틀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아빤 거짓으로 엄마가 병원에 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엄마 품에서 떨어진 자식이었다.
수경이와 나는 나란히 손잡고 서서 관이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 앤 제 언니의 눈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저도 따라 눈물을 흘리는 거였다. 아이의 울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인간이별(人間離別)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등으로 서럽게 눈자위만 훔치는 것이다.
막내의 품에는 늘 제 몸통만한 토끼 저금통이 들려있었다. 옴파리 같은 손으로 눈물을 닦을 때 저금통이 그만 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거죽만 단단할 뿐이던 토끼 저금통은 방바닥으로 뒹굴면서 가벼운 쇳소리를 냈다. 언젠간 꼭 엄마 병원비로 쓸 거라며 모은 아이의 동전 몇 푼이 상가(喪家)에 모인 어른들의 가슴을 후벼놓았다.
돌이 지났을 무렵, 동생은 우윳병을 떼고 밥알을 깨물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면 대체로 셋방 아기들은 발가벗고 울안을 돌아다녔다. 내 동생 수경이도 신화 속의 어린 님프들처럼 오동통한 맨살과 날갯죽지를 내놓은 채 온 마당을 휘젓고 다녔다. 사내와 계집의 구별이 없는 천둥벌거숭이들이 뛰어노는 양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그 애들은 모이를 쪼는 병아리처럼 뭔가를 주워 먹기도 하고, 손톱 밑이 새까매지도록 흙을 파헤쳐놓기도 하며, 또 그러다가 제 어미의 치맛단 위에 드러누워 금세 잠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유로운 셋방 풍경이 어디 있으랴. 울안의 엄마들은 평상 위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한담(閑談)을 나누고 있었다. 비위도 좋은 아이들의 턱이며 목덜미며 겨드랑이와 손바닥이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해질녘이면 마당 수돗가가 어린 것들의 땟국 씻기는 물소리로 분주해지곤 하였다.
어느 날 오후, 마당 한쪽에서 귀를 찢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외마디 비명소리가 났다. 엄마와 울안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수경이의 알몸이 셋방의 콘크리트 벽과 뜨거운 연탄 화덕 사이에 꽉 끼여 있었다. 맨살의 아기는 여름 날 부엌 밖으로 내놓은 화덕 옆에서 놀고 있었나 보다. 불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그 어린 것이 한 손으로 화덕을 자꾸만 밀어내고 있는 거였다.
한 사람은 애를 빼내고 한 사람은 화덕을 치우고. 엄마는 동생을 집어 들다시피 안고 수돗가로 갔다. 그리고 날더러 당장 점방에 가서 소주를 사오라는 것이다. 나는 멋도 모르고 외상으로 소주를 가져와 엄마에게 건넸다. 놀란 엄마는 어린 것을 다리 사이에 끼고 소주병 뚜껑을 따더니, 온통 붉어진 살덩이에 들이붓는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을 넘고 담을 지나 동네어귀까지 터져나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엄마, 엄마. 자못해떠요, 자못해떠요. 다찌는 안 그더께요.” 두 돌도 안 된 것이 그렇게 손바닥을 비비며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양피지 조각처럼 너덜거리는 동생의 뺨과 겨드랑이와 가슴팍과 손바닥의 살점들을 보았다. 소주에 절여진 아기의 몰골은 처참했다. 엄마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으리라. 셋방의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소주 갖고 와! 소주, 소주!” 하고 외쳐댔고 엄마의 머릿속엔 소주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빤 평상에 막내를 눕히고 화농균을 가라앉힐 약품을 조제하여 아이의 얼굴과 몸통에 붙였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정성껏 소독을 하고, 몇 날 며칠을 노랗고 촉촉한 거즈를 덮었다가, 또 마르기도 전에 떼어낸 후 다른 거즈로 바꾸어 붙이기를 반복하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불에 덴 수경이의 얼굴이 찐빵처럼 퉁퉁 부풀어 올랐다. 부은 얼굴 탓에 한쪽 눈은 아예 뜨지도 못하였지만, 그 앤 “언니야, 언니야.” 부르며 나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예쁘지 않아. 이렇게 생긴 애가 내 동생이라니.’ 나는 붕대로 감은 아이의 손을 붙들고 서서 상처 속의 요정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아빠의 지극정성으로 수경이의 증세는 점점 호전되어갔다. 적절한 처방과 조치를 취한 덕에 피부에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상처는 아물어가고 딱지는 더 이상 앉지 않았다. 엄마는 나날이 시들어갔지만 동생은 무럭무럭 자랐다. 밥알처럼 무른 겨드랑이에 얼룩덜룩 자잘한 흉터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매끄럽던 아이의 한쪽 뺨은 숟가락으로 떠낸 것처럼 깊이 파였다.
“정말 끔찍했어. 나는 소주를 사오고, 사람들은 들이붓고, 애는 발악을 하고.”
불에 불을 끼얹는 형국이라니, 게다가 아기의 상처에 소주를 붓다니,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얼마나 답답하고 우매한 행동이냐며 식구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하이고 참 나. 정말 미련한 짓이여. 큰일 나는 거여. 화상 입은 상처는 말여, 말라버리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여. 그냥 촉초근허니 젖은 상태에서 낫게 거시기를 잘 혀야 혀.”
아빠도 흥분하여 연신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하신다. 아빠와 삼 남매, 우리에게 과연 종교라는 게 필요나 하였을까. 말하자면 우린 서로가 서로의 종교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잔 거하게 걸친 동생의 뺨이 발그레하다. 그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는가. 수경이는 마냥 기분이 좋아서 흥얼거린다.
“내가 제일 잘 나가, 아빠아, 형부우, 언니이. 김 서방이 제일 잘 나가. 내 새끼들도 잘 나가. 우리가 제에일 잘 나간당께에.”
개성공단을 오가며 일을 하는 제부(弟夫)도 흥이 나는지 “내 사랑하는 수경이, 그리고 아버님. 에- 또, 개성의 우리 에미나이들을 위하여!” 하고 외치니 실로 부창부수(夫唱婦隨)가 아닐 수 없다.
동짓달에 태어난 수경이는 억울하게도 ‘애맨 살(애매한 나이)’을 먹었다. 내 눈에, 그 앤 대여섯 살 적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눈이며 코며 입 모양새며, 마음씨까지 온전히 ‘어른 같은 아이’였다. 또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여름 날 화덕에 덴 뺨의 흉터였다.
작고 창백한 얼굴이 기다란 생머리에 가려 우는지 웃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취해버린 수경이의 표정, 사실 내 동생은 잘 나도는 여자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가 정말로 잘 나가서가 아니라 굴곡 많았던 제 남편의 사업이 다소 괜찮아졌고,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잘 자라주고 있으므로 기분 째지게 좋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째질 것 같은 행복에 술잔을 연방 기울이며, ‘소백산맥(네 가지 술의 종류)’을 넘고 삼수갑산에 오르더라도 “내가 제일 잘 나간다” 며 어디 한번 갈 데까지 가자고 흥얼거리는 것이다.
그 어린 게 두 아이의 엄마로 자라다니, 그 애가 낳은 딸이 벌써 스무 살이 되다니, 세상 두려운 게 하나도 없을 것처럼 보이다니, 마침내 알코올의 공포를 극복하다니, 나는 생각할수록 서글프나 짐짓 웃음이 난다.
- 한국 산문 2014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