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향하는 외출
엄마의 자궁 속에서 이탈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무수히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일탈을 꿈꾸며 안주하지 못하는 본성은 아마도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갖춘 태초의 파라다이스에서 조차 일탈을 꿈꾸어 그 동산을 쫓겨나게 되는 그때부터 우리의 방랑기질이 DNA화 되어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2006년 여름 홍콩을 향해 떠나는 가족들의 발걸음은 설렘이었다. 모든 꿈을 가슴에 품고 떠나는 소위 직업이민이었다. 아무도 입에 담진 않았지만 개인이 아닌 가족이 함께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IMF의 직격탄을 맞으며 남편의 의류사업이 기울자 이것저것 손대보던 일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피폐한 마음에 많이 방황하던 시기였다. 이미 먼저 선교사로 나가있는 언니를 통해 중국의 정보를 듣고 남편은 날마다 나를 꼬드겼다. 그곳에서 마지막 자신의 야망을 펼쳐보고 싶다고 신기루 같은 말들을 몽실몽실 내게 던져주었다. 처음엔 아예 귀를 막았지만 차츰 나를 간질이는 그의 신기루가 나의 신기루가 되어갔다. 밤마다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고민을 하던 끝에 큰아이 군 입대를 D-데이로 정하고 준비를 했다. 마침 공부에 관심이 없는 작은 아이는 고3 이어서 이 기회에 중국어라도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나름 가야하는 타당성을 하나 더 만들고 있었다.
이왕 가는 거 홍콩을 경유해 여행 겸해서 가기로 일정을 정했다. 미래에 대한 설렘과 낯선 곳에 대한 흥분이 묘하게 엉키며 홍콩여행을 마치고 중국 남부지방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똥짠(東站)’역에 도착했다. 상업도시인 그곳은 열대지방 특유의 작은 체구의 한족들이 주류를 이루는 근대산업시대 이전부터 무역이 성행한 도시였다. 일 년 열두 달 각종 무역박람회가 열리고 인구 1억 정도의 대도시로서 보통화를 공용어로 쓰지만 한족들은 주로 광동어를 쓴다. 기후는 아열대 계절풍으로 여름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고 습기가 많아 겨울은 쌀쌀한 편이다. 2010년 제 16회 아시안 게임이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춘제(春節)에는 인구 대이동이 시작된다. 우리나라 뉴스시간에 주로 나오는 그 장면이 바로 광저우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작은아들은 기남대학(?南大學) 중국어학과에 입학하고 남편과 나는 매일아침 도매시장으로 나갔다. 일단은 현장을 보고 파악해야 할 것 같아 눈으로 익히기로 했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큰 시장 규모가 놀라웠다. 과연 전 세계 의류의 메카 대규모 시장다웠다. 어쩌면 의류시장이 아니라 인종시장처럼 세계 각양각색의 유색인종들이 하루 종일 붐비는 곳이었다. 전문적인 부자재 시장과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시장 규모도 우리나라 의류의 중심지 동대문시장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인맥을 통해 한국기업인들의 공장과 매장 그리고 미주지역과 유럽 쪽 오더에 관한 정보도 듣고 보고 알게 되었다.
이미 발 빠르고 두뇌가 빠른 한국의 기업인들의 진출이 상당량 진출해서 성공가도를 걷고 있었다. 살짝 주눅이 들기 시작한 남편에게 관망의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일찍이 실패를 맞본 그는 쉽게 주머니를 열려 하지 않았고, 의심은 많아만 갔다. 평소 남편의 여성의류사업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번 기회에 디자인과 사업을 배워보고 싶기도 했던 터라 발이 부르트도록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한국 기업에 샘플을 보내고 오더를 받고, 원단을 고르고 디자인을 선택하는 일에 남편은 나의 안목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 의견에 맞추었다. 조금씩 한국의 오더가 들어오고 짬짬이 교민들과 골프도 즐기는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낯선 그곳 많은 이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낯선 언어와 낯선 얼굴들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큰 성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분명 맑은 하늘에 해가 따뜻하게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행복하다는 생각보다는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이 더 많이 밀려왔다. ‘밖을 돌아다니는 저들은 모두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들이 자주 내 마음속에서 출렁거렸다. 적어도 내가 본 관점에서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그들 문화를 들여다 볼 뿐이지 즐기지도 동참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끼리 교류하고, 한국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고, 한국 사람들끼리 사업하고…….
내가 이 낯선 땅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을 때쯤 군대에 있는 큰아들에게서 비보가 날아왔다. 한국의 경기는 여전히 맥을 못 추고 오더가 다시 끊기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때였다. 날고 기는 선수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투자를 더해서 확장을 해야 하나 아니면 적당히 버무리다 가야하나 기로에 서있던 터였다.
큰아들이 군대에서 훈련 중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까지 해야 한단다. 애타는 어미의 심정을 뒤로하고 중국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이에게 못할 짓 하는 것처럼 죄스럽기만 했다. 급한 일들을 미루고 한국으로 날아왔으나 의가사(醫家事)로 제대를 해야 한단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계산되고 있었다. 작은 아이를 언니 집에 맡기고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이 일련의 일들이 내 계산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아비규환의 시간들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동안 성공을 향해 달려갔지만 물질을 더 잃었고, 그 이상으로 우리 가족 모두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그 무엇을 얻어 돌아오는 기회의 시간들 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 땅에서만 살아온 우리에게 기회의 땅인 그곳에서 세계를 보는 안목을 넓히고 돌아왔다. 잃은 만큼 얻는 게 있다는 거, 얻는 만큼 잃는 게 있다는 순수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고은, <그 꽃>
산을 오른다는 것은 내려오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집을 나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집을 나설 때 볼 수 없었던 귀한 것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꼭 치러내야 할 일을 치른 듯 후련하고 게운했다.
갑자기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처럼 설원이 아닌 뻥 뚫린 대지 위에서라도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오겡끼데스까? (おげんきですか.)’
굳이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별일 없으신가요?’ ‘평안 하시죠?’ 이다. 내가 삶의 기로에서 오를락 거리고 있을 때 나를 지켜보아주고 나를 믿어 준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산을 내려오거나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는 아닐 터이다. 많은 것을 가슴에 담고 성숙한 나와 만날 것을 믿었다. 또한 나쁜 일을 통해서라도 내게 선을 돌려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