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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잠수함    
글쓴이 : 김창식    15-07-27 17:14    조회 : 6,914
                                              광화문 잠수함
 
 
  올여름은 장마철이 따로 없잖아. 7월의 뒤끝에 주야장천 비가 내리더군. 물난리 통이던 어느 날 신문에 헤드라인으로 걸린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어. 물에 잠긴 광화문 네거리 모습이야. 비바람에 초점이 흔들렸는지 사진도 물 속 인화지처럼 흐릿했어. 행인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물로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어진 광장 한편에 서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거야.  
 
 사진 가운데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긴 칼 옆에 차고 여느 때보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어. 좌대에 새겨진 거북선이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더라니까. 삼군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물에 잠긴 도심 한 복판에 떠 있는 암각의 거북선이라니. , 거북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군. 거북의 몸체가 잠수함의 등처럼 명랑 앞바다로 나아가네.
 
 광화문이 항구인 적이 있었어. 처음 생긴 지하도가 생각나는군. 흰색과 하늘색의 조개껍질을 포개놓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한 귀퉁이를 떼어다 놓은 것 같던 그 지하도. 당시로는 최신 접안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항구였다고 할 수 있지. 나의 발길이 그리로 향한 것은 그곳에 수상한 선박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들은 때문이야. 사람들이 그곳에서 떠오르는 잠수함의 환영을 보았다고 했거든. 파도를 헤치며 잠수함이 떠올랐을 때 매복이 있었어. 함교로 나오던 네모 선장은 유탄을 맞았지. 갑판 위로 물결이 엇갈리며 뚜뚜뚜뚜잠수함이 황급히 잠수를 시작하는군.
 
 광화문에 서면 레고 블록처럼 튕겨져 나간 청춘의 한 조각이 반짝 눈을 뜨곤 해. 거리가 시네마스코프 활동사진처럼 펼쳐지네. 국제극장 뒤 시네마코리아 극장에서는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흑백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가 상영되고 있었어. 물안개 낀 고성, 호반의 기숙학교, 사슴과 대화하는 청년 뱅상. 검은 색 마차와 개, 환영인지 실체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운 초상화 속의 처녀. 마리안느는 사랑에 목마르고 괴로워하는 그 시절 젊은이들의 로망이자 표상이었지.
 
 우리가 청춘이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머무는 것인 줄, 마냥 지속되는 것인 줄 알았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처럼 천년만년 늙지 않을 줄만 알았던 거야. 그런데 청춘은 반짝하면 그것으로 끝이더라니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청춘 속에 진입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어. 그때 벌써 ''이 시작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모든 것의 '시작'''을 이미 잉태하고 있는 거지. 과일이 단단한 씨앗을 품듯.
 
 어쨌거나 나의 발길은 광화문 지하도로 향했어. 시네마코리아 극장에 긴 머리 마리안느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건너편 시민회관 강당에 김자경 오페라단의 <라 보엠> 창립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내걸렸으며, 그 옆 건물 2층 크라운제과의 엠프에서 볼프 페라리의 <성모의 보석 중 제 2막의 간주곡>이 흘러나오고, 길가에 늘어선 의료기기 가게 쇼윈도로부터 의수?의족을 단 로봇들이 걸어 나오며, 상업은행 뒷골목에는 교복을 입은 고교생들이 희고 검은 인형처럼 떼 지어 오갔어.
 
 그곳에 다다르자 발길은 붙박이처럼 머물고, 마음은 무지개를 보는 소년처럼 뛰놀며,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나치고, 얼굴은 미열을 동반한 기대로 달아올랐다네. 누굴 만날지도 모른다는 열망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 오래 소식 없는 친구, 아니면 그저 아는 사이일 뿐인 사람이라도 상관이야  없지, 그가 누구든 간에. 누군가 지하도에서 잠수함처럼 '불쑥' 떠오를 것만 같았어그가 내 손을 잡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었으면. 그것이 잘못된 바람인지 누군들 알았을라고.
 
 그런데 후에 사람들이 덧붙인 이야기를 들었어. 잠수함은 한 번도 타타타타떠오른 적이 없었다는 거지. 잠수함이 어떻게 된 것일까? 잠수함은 본디 출항허가도 없이 젊은 물살을 헤치며 먼 바다로 나아갔고 원인 모를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다 몸체를 비스듬히 모래톱에 파묻은 채 수초에 포박당해 있으리라는 것이야. 어쩌면 잠수함은 바다의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몰라. 그곳에서 사라진 도시의 흔적을 보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시 난 시린 바람을 맞으며 물의 도시로 돌아와 생각하는 것이야. 단지 누가 내게 시간을 주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세상은 무섭지 않았어. 그렇더라도 나는 과거가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자박자박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저 만치 앞쪽에 자기를 유괴할 어둠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랬구나, 나 역시 꿈도 희망도 없이 산란散亂의 먼 바다로 나아간 것이었어. 스스로 실종되려고.
 
 이윽고 나는 풍랑에 시달려 돛이 꺾이고 몸체에 숭숭 구멍이 뚫린 피로한 행색의 배가 되어 각성의 현실로 되돌아온다네. 위험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냐. 물이 차 넘치는 도심의 항구에서 반쯤 잠긴 채 나를 인도해줄 예인선曳引船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어서. 언제가 될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 그러다 물이 빠지면, , 어찌할거나, 오도 가도 못하는 폐선廢船이 되어 갯벌에 사각斜角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이고. 
 *한국실험수필 2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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