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밴드를 시작했다. 고교 동창 4명과 함께 록인지 락인지를 연주한댄다. 다들 학창시절 ‘음악 좀했다’는 이들이라지만, 배가 불룩한 50대 중년남성 다섯 명이 전자기타를 휘두르고 샤우팅을 하겠다니, 이것이 과연 취미인지 낭만인지 재미인지 용기인지 아니면 그냥 주책인지 모를 일이다. 드럼을 치려니 도무지 젊었을 때 같은 파워가 나오질 않는댄다. 목소리가 자꾸 갈라져 노래할 때 속상하댄다. 기억력이 떨어져 악보를 외우기가 어렵댄다. 밴드를 시작하며 이런 고민에 빠진 그들을 보는 내 소감은 ‘대략 난감’이다.
밴드 이름은 ‘오이스터(Oyster:굴) 밴드’.
이름으로만 보면 굴요리 마니아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 조직했거나 아니면 생굴 안주에 소주 마시다 말고 되는대로 갖다 붙였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굴 따는 해녀를 마누라로 둔 남자들끼리 작당해서 결성한 것 같지만, 사실 밴드 이름에 해산물, 그것도 생긴 것도 하나도 예쁘지 않은 '굴'이 붙은 건 알고 보면 우연과 필연, 운명과 숙명이 함축되어 탄생한 결과다.
서울 소재 K고등학교 52회 졸업생으로 구성된 그들은, 밴드 이름 짓는 게 술안주 정하는 것보다 쉬웠다. 누군가 “우리는 52회니까 52를 넣어야지”라고 말하자 또다른 누군가가 “그럼 ‘스타’를 붙여서 ‘52(오이)스타’라고 하는 건 어때”라고 말하였고, 모여서 연습 좀 하다가 끝나면 술 마시고 놀면 됐지 그까짓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때 라고 생각했다고 보장할 순 없지만 아무래도 그랬을 것 같은 나머지 3인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임으로써 마치 군장성 출신 사조직 모임 같은 ‘52스타’라는 이름이 2분 만에 결정됐다.
그런데 첫 연주발표가 있기 전, 연주장 직원이 전화로 밴드 이름을 물었고, 멤버 중 한명이 “52(오이)스타인데요” 라고 대답했고, 직원이 “네? 오이스터요?”라고 물었고, 멤버 중 한명이 “네, 오이스타요”라고 대답했고, 며칠 후 저녁 연주장에 ‘Oyster Band’라는 사뭇 전위적 이름이 적힌 안내문이 걸리게 됐고, 그것을 본 멤버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굴’이 그들의 운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숙명적 사연을 갖고 탄생한 오이스터 밴드.
밴드 이름은 그렇게 운명에 맡겨버렸지만 연습곡을 선정할 때는 꽤나 진지한 듯하다.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의견도 제각각이다. 이왕이면 폼나는 곡으로 하자는 말도 있고 쉬운 곡부터 연습하자는 주장도 있다. 서로 자신의 역할이 돋보이는 곡을 연주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의견이 충돌되고 수렴되어 주로 이글즈의 ‘Hotel California’나 로버트 파머의 ‘Bad case of loving you' 처럼 7,80년대를 풍미했던 락음악 들을 선곡해서 연습한다. 그러자 왕년의 딴따라들이 다시 뭉쳤다는 소문이 동창들 사이에 났나 보다. 동창들 입소문에 힘입어 심심치 않게 불려다니며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서니, 나의 우려와 한탄과 저주-비싼 악기와 장비를 끝없이 사들인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아마추어 밴드로서 모양새는 갖춘 셈이 됐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밴드인가. 뭘 잘못 먹었나. 혹시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고 노래하는 조용필 형님을 보고 감동을 너무 받아 버린 건 아닌가(조용필 곡 송호근 작사 <어느날 귀로에서>. 한국의 중년 세대에 대한 노랫말).
멤버들 본업은 다양하다. 수학 강사, 중소기업 경영인, 세무사, 부동산 중개인, 일간지 사진기자 등. 다들 밴드를 벗어나면 집안의 가장이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생활인들이다. 이들 중에는 삶이 안정되어 여유를 누리는 이도 있고 반복된 일상이 무료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고 있는 일이 잘 안 풀려 고민스러운 멤버도 있다. 하는 일과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평범한 한국 중년남자’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아저씨들이다.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온 평범한 아저씨들은 인생의 그 즈음엔 그저 생활하는 일 외에 뭔가에 몰두해보고 싶은 걸까.
젊은 시절 음악을 하겠다며 뭉쳐 다니다가 뿔뿔이 흩어진지 30년. 그 사이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키웠고, 직업을 가졌고, 사업을 했고, 간혹 망하기도 했고, 술도 많이도 마셨고, 집을 마련했고, 집을 날리기도 했고, 선거일엔 투표를 했고, 선거일에 투표 안하고 놀러가기도 했고, 부부싸움을 했고, 모르긴 해도 어쩌면 한두번쯤 바람도 피웠을지 모른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역시 대체로 ‘평범한 중년남자’가 겪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평범한 중년 남자들답게, 그들을 묶어두던 무언가로부터 풀려나고 싶은 때가 됐나 보다. 그들 말에 의하면 요즘 중장년층이 직장인 밴드를 결성하는 게 유행이니 우리도 빠질 수 없댄다. 그들은 또한 말하길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날의 추억을 아파만 하기엔 시간이 많지 않댄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 에너지를 쓰고 싶댄다. 폼 잡고 싶댄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젊은 척 하고 싶댄다. 연주할 때만큼은 젊었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낀댄다. 가족은 잊고 싶댄다. 돈벌이도 잊고 싶댄다. 마누라 속 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겠댄다. 말리지 말랜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아저씨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오이스터 밴드. 그동안 먹은 세월 때문에 배는 불룩하고 머리는 성글었지만 열정만큼은 젊은이들 밴드 저리가라다. 가족이 아닌 팬의 입장에서, 오이스터 밴드에게 응원을 보낸다.
(한국산문 2013.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