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안 나와
박유향
낮, 설거지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손에 낀 후 야심차게 수도꼭지를 돌렸다.
퍼퍼퍽푸푸푹퍽.
좁은 파이프 관에서 압력을 받고 있던 공기가 숨통 트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곤 이내 잠잠하다.
오잉? 다시 한 번.
···
달라질 리가 있나.
꼬부라진 수도꼭지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아니 냉정하게, 아니 무심하게, 아니 썰렁하게, 아니 뻔뻔하게 침묵을 지킨다.
이럴 수가...
물이 안 나오는 것이다. 물이. 물 물 물이!!!!!!!!!!!!
그렇다면 화장실은? 쏜살같이 날아서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본다. 역시 퍼퍼퍽.
혹시 변기도? 손잡이를 돌리니 역시 철커덕.
이런... 신경이 쭈뼛 곤두선다. 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세포들이 일제히 ‘뭐라구? 물이 안나온다구?’ 하면서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것 같다.
물론, 육안으론 1분전과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설거지통에 그릇들이 쌓여있고, 화장실엔 칫솔 세 개가 꽂혀있고, 베란다에는 빨래가 널려있다. 컴퓨터에선 커서가 깜빡이고 있고, 난 여전히 눈을 껌뻑이고 있으며, 신문은 5면이 펼쳐진 채다. 천둥 번개가 치지도 않았고, 이 나라에 난리가 나지도 않았다.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현관을 나서고 있던 여자가 그사이 30미터 정도 전진해 모퉁이를 돌고 있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다. 적어도 나한텐.
그러나, 그 1분도 채 안 되는 사이 나의 세계는 송두리째 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1분 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1분 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기억도 할 수 없다. 아니, 그런 게 있었는지 의식 할 수도 없다.
물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의 나는, 오로지 물이 안 나온다는 사실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 됐다. 나는 물이 안 나오잖아. 물이 안 나오네. 물이 안 나와서 어떡하지. 물이 안 나와서 큰일 났어. 물이 왜 안 나오는 거야. 물이 안 나와. 물 물 물 물 물이!
집안에 있는 물을 가늠해 본다. 마실 물도 없다. 갑자기 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며칠 만에 집에 왔는데 샤워를 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찝찝하다. 내 손과 발과 머리카락은 더럽기 짝이 없고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이 더러운 손으로 아무 것도 만져서는 안 될 것 같다. 어딘가 가려운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맨날 설거지 쌓아놓고 사는 주제에 지금 당장 못하고 있는 설거지가 신경에 거슬려 죽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베란다 물청소는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절박한 심정으로 마른 베란다를 노려본다. 갑자기 갈증이 난다. 마시는 물도 아껴야 하지 않을까. 식물들이 말라 죽어가는 것 같다. 벤자민 이파리가 물을 달라! 외치고 있다. 이 집은 폐가다. 물이 없어 모든 것은 말라 비틀어졌고 생명이라곤 남지 않은 버려진 집이다. 나의 소원은, 오로지 나의 소원은 물이 나오는 것이다. 물이 나오는 것 외엔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는 것은 없다!
나는 식탁의자에 맥 빠진 채 앉아 '물이 안 나온다'를 천 번 반복해서 생각한 후, 천천히 일어났다. 관리실에 인터폰을 했다.
"물이................안나와요..........." 나는 낙방한 수험생처럼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재난 앞에서 관리인은 대범했다.
"아이구, 어제 방송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오늘 10시부터 2시까지 물탱크 청소하느라 급수가 중지된다구. 아까부터 안 나왔었는데 모르셨어요? 지금 한시 넘었으니까, 좀 있으면 나올 거예요"
세상에... 그러니까 물이 안 나온 지가 무려 세 시간도 넘었단 말이지. 3분도 아니고 30분도 아니고 세 시간이나 흘렀단 말이지. 그런데 그 사이 난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었단 말이지. 물이 안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바보처럼 앉아 뭐 맛있는 거 없나? 뭐 재미난 일 없나? 오늘 저녁 볼만한 프로가 뭐가 있을까?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지.
기운이 쑥 빠졌다. 나는 다시 식탁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물이 안 나온다는 사실과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과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과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과 물이 안 나온 것을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며, 물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십분 마다 한 번씩 일어나 수도꼭지를 돌려봤다.
그러길 너댓번. 드디어
푸푸푹파팍 쏴아아!
와! 물이다. 물 물 물 물이, 물이 나온다! 물이 쏟아진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이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집안의 모든 것이 반짝인다. 폐허라니. 가족들의 숨결이 집안 구석구석 배어있지 않은가. 벤자민도 쭈욱쭉 잘만 자란다. 초록이파리 끝에는 물기마저 머금고 있는 것 같다. 베란다? 아직 뭐, 다음 주에 청소해도 되겠네. 샤워? 뭔 소리야, 어제 했잖아. 까짓거 하려던 거니 설거지는 해주마. 그런데 그릇도 얼마 안되네? 나중에 몰아서 할까보다! 아참, 물 마시려고 했었지.
물이 안 나와! 라고 외쳤던 그 순간부터 물이 나오기 시작할 때까지의 걱정과 근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뿐인가. 그 소원이던 물이 드디어 나오는데, 못되게도 나는 단 1초만 즐거워했을 뿐이다. 그리고 물이 나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물 생각 따윈 절대 하지 않는다. 물이라니,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나는 다시 뭔가 먹고 싶어졌고 머릿속으로 오늘 저녁 메뉴를 짰으며 저녁엔 드라마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오직 안 아픈 것만이 소원이던 환자가 병에서 회복된 후 자신이 안 아프다는 평범한 사실에 대해 하나도 행복을 느끼지 않듯이.
죽도록 원하던 무언가를 얻고 난 후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듯이.
내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물이 안 나와 사건은 그렇게 있으나 마나한 일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에세이문예 201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