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 긴 이야기
박유향
여행을 가게 된 것은 아버지 고집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한해 전 돌아가신 큰아버지 장지에 못 가본 것을 내내 서운해 하셨다. 장지는 아버지 고향 선산에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 여행은 무리였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때였다. 1박2일 일정으로 내가 모시고 갔다 오기로 했다. 그리고 한 할머니가 그 여행에 동행했다.
여행 갈 생각에 잠도 설치고 나왔다는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큰아버지 계신 곳을 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얘기였다. 처음 만나는 할머니였지만 그 분의 존재를 전해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먹하고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왕복 10시간 동안 좁은 차 안에서 이 할머니와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난감했다. 병이 깊은 아버지와 낯선 할머니. 죽기 전에 한 번은, 이라는 단서가 달린, 돌아가신 분의 산소를 보러가기 위한 여행. 도무지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다.
큰아버지는 사회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다 가셨지만 가정생활이 편치 않아 늘 불행하셨던 분이다. 낭만적인 기질이었던 큰아버지와 곧고 날카로운 성품의 큰어머니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화목한 가정을 일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시대 정서에 이혼도 못한 채 거의 일평생을 보내는 것은 옆에서 봐도 피로감이 느껴졌다. 사촌 형제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군것질과 놀이거리에 몰두하던 시절, 큰집에 가면 어린 나이에도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춘기에 들어선 사촌오빠는 집안 분위기에 반항해 말썽도 자주 피운다고 들었다.
큰아버지가 일흔세 넘어 결국 두 분은 정식으로 이혼을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감정을 소비하느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후였다. 게다가 큰아버지는 이런저런 문제로 재산도 거의 잃고 자식들도 모두 외국에 나가 자리를 잡은 상태라 쓸쓸한 노후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신경을 썼지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대책 없이 난감해 하던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큰아버지한테 여자가 있댄다”.
“뭐? 여자?” 듣는 순간 난 인상을 살짝 찌푸린 것 같다. 일흔 살이 한참 넘은 나이에 여자라니, 좀 민망스러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엄마도 마음의 부담을 덜어 무척 반기는 눈치였다. 나도 곧 축하하는 심정이 들었다. 듣기로는 새로운 분과 살림을 시작한 큰아버지도 무척 행복해 하신다니, 그분이 얼마 만에 집안에서 아늑함을 느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주위에 소문 내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소곤거리며 큰아버지를 진심으로 축복해줬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큰아버지는 일 년 만에 쓰러지셨다. 그 후로 돌아가시기까지 3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큰아버지를 지켜준 사람은 그 분의 새로운 ‘여자’였다. 그 여자가 한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병수발을 든다든가, 병원비를 모두 대고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해는 잘 안됐지만 다행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큰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여자’는 끝내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행에 동행한 할머니는 그 ‘여자’였다. 키가 크고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할머니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음악선생님을 하다가 정년퇴직했다고 했다. 더 이상은 알 필요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큰아버지 황혼의 사적인 이야기에 호기심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차안에서의 무료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화는 이어졌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말년에 큰아버지와 함께 했다고 해도, 같이 한 시간에 비해 할머니의 우리 집안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너무 각별했다. 가까운 친척들 뿐 아니라 나도 잘 모르는 먼 친척들 안부까지도 할머니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아버지를 언제부터 아셨어요?
“스무살 무렵이었지...즈하고 나하고 서로 안 게”
...그랬구나.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즈하고 나하고 만나면 뭐 할 얘기가 있어야재. 만날 형제들 얘기, 고향 얘기, 친척들 얘기...그래서 니 아부지도 남같지 않았다 아이가”
그랬구나. 그래서 저렇게 잘 아시는구나.
“그러다 그렇게 혼자 되시구...그만 몸이 안좋아지시대. 안되겠다 싶어서 같이 살았다 아이가”
그것도 그랬구나. 몸이 안좋아지셔서.
창밖으로 복잡한 교차로가 휙 지나갔다. 엇갈린 인연들이 휙 스쳤다.
어둡고 무서웠던 큰어머니와, 부모님의 불화에 늘 지쳐있던 사촌 형제들 얼굴이 떠올랐다. 숨을 한꺼번에 쉴 수가 없었다. 조금씩 숨을 내쉬면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가자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한 시간을 더 가는 깊은 시골. 한창 익은 벼이삭이 손에 잡힐 것 같이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할머니는 큰아버지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것 같았다. “여긴가배...그리 고향 얘기를 해싸터만 여기가 고향인가배...아이구 사람...여기가 뭐가 그렇게 좋소...”
마을 뒷산에 있는 산소는 그 사이 풀이 많이 자라 형태도 잘 안보였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앞장 서 벌초를 하고,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가지고 온 소주와 바나나와 빵을 펼쳐놓고 할머니는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쏟아내듯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그리 누워 있으니 편하오...” 할머니의 울음소리에 무덤가의 들풀이 작게 흔들렸다. 산 아래 넓은 들은 고요하게 숨을 죽였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들어서자 고향에 남은 친척 몇 명이 우리를 반겼다. 할머니는 그들 앞에도 나서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딴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산소관리 이야기가 나왔을 때, 친척들은 아무도 할머니의 의견을 먼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머니의 의견을 그들에게 전할 때 그들 중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무언의 비밀 결사대처럼, 늦여름 해가 기울어지는 들판에 선 그들은 무언가를 마음에 심고 또 묻어두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날 돌아오는 길,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에도 할머니의 흐느낌은 계속됐다. “인생이 참...허무하다 아이가....그챼...”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면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창밖으로 늙은 산과 논이 천천히 지나갔다. 할머니의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인생’이나 ‘사랑’ 같은 단어를 떠올렸지만 어쩐지 그 말들도 의미 없게 느껴졌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비로소 할머니의 흐느낌 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흐느낌에 지친 할머니와 병든 아버지, 깊이 잠든 두 분의 옅은 숨소리를 느끼며 나는 사랑이나 인생보다도 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운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