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원 마루에 앉아 드넓은 지족 해협을 바라본다. 떠나는 여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삶의 굴곡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저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축복처럼 저녁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다. 지금, 야위어 가는 저 바다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만선의 꿈을 안고 떠난 고깃배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여름이 남기고 간 풋사랑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일까. 나는 허기진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바다의 곡절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소요원은 남해군 창선면에 위치한 펜션을 겸한 전통찻집이다. 어느 명절 날, 우연히 한 번 들렀던 곳인데 계절마다 달라 보이는 찻집 건너 탁 트인 바닷가 풍경에 빠져 남해에 갈 때마다 친정집 가듯 편안한 마음으로 가는 곳이다.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언덕배기에서 옛사랑을 기다리듯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는 이 고풍스런 찻집에 그만 반해버렸다.
이곳에 오면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어서 좋다. 끊임없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잘한 일상들을 한꺼번에 내려놓을 수 있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이곳에선 마음이 좀 풀어져도 좋다. 가슴속에 품었던 독기들도 잠시 잊기로 한다. 장자는 즐거움의 근원을 낙출허(樂出虛 -즐거움은 마음을 비우는 데서 비롯된다)에서 찾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을 비워 고요하고 한가하게 지내며, 분수에 넘치게 바라는 마음을 반으로 접어둘 때 삶의 즐거움이 생겨난다고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사는 게 뭐 별 건가. 세끼 밥 먹을 수 있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여유롭게 차 한 잔 할 수 있으면 족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수시로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세속적 욕망들을 어쩌지 못해 나는 마음속으로 또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던가.
'인생을 자유롭게 거니는 동산'이란 의미의 소요원은 전통한옥으로 건축업을 하던 주인이 하나하나 자재를 구해 터를 닦는 데 일 년, 집을 짓는 데 일 년에 걸쳐 직접 지었다고 한다. 원목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천장과 400년 된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탁자, 각종 차와 생활자기들이 눈길을 머물게 한다. 속도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잠시라도 느림의 미학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여주인의 푸근한 마음 씀씀이 또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다. 일 년에 두세 번 가물에 콩 나듯 찾아드는 이 객을 잊지 않고 서울서 왔다며 제일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 잠시 자연의 조화를 따르다가
이 생명 다하는대로 돌아가리니, 주어진 천명(天命)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도연명〈귀거래사〉부분
그녀를 보며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떠올린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녀가 도시에서 생활하다 물도 설고 낯도 선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고 손님을 맞는 모습은 도연명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유유자적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남해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몇 년간 계획을 세우고 답사를 하다가 결국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그녀. 무작정 전원생활을 꿈꾸며 이곳으로 스며들었던 사람들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떠나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한다.
가끔은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나처럼 소요원을 사랑하여 잊지 않고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 즐겁고 감사하단다. 언젠가 이 일을 못하게 될지라도 남해를 고향 삼아 평생을 이곳에서 살겠다는 그녀의 잔잔한 모습은 소요원의 운치있는 풍경과 함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차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잠시 일상을 벗어나 유유자적 머물 수 있는 곳. 이곳의 바다는 흐느끼는 감정들마저도 유유히 삼켜버린다. 불빛이 사그라지듯 지나간 아픈 기억들조차 품에 가득 안은 채 그는 말이 없다.
소요원 주위에는 화가들의 작업실과 내가 아는 한 소설가의 집필실도 있다. 모두들 복잡한 삶들을 잠시 잊고 편안한 휴식을 꿈꾸며 이곳으로 찾아들었으리라. 끝없이 펼쳐지는 다도해가 꿈결인 듯 가슴에 와 닿는 이 바다를 보면서 복잡한 세상사 속에서 잠시 마음에 쉼표 하나 찍을 수 있어 좋다.
금빛 바다를 배경으로 갈매기 한 마리 힘차게 날아오른다. 지금 내 안의 빈자리엔 무엇이 차 있는가. 오늘이 지나면 나는 또다시 복잡한 일상사로 돌아가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철길처럼 반복되는 일들과 함께 숨 가픈 경주를 하게 될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눈 앞의 모든 것이 공(空)인 것을. 어쩌면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르는데 나는 또 무엇을 바라고 이 복잡한 현실에 매달린단 말인가.
저만치서 소금기 가득 머금은 바닷바람이 연갈색 치마를 펄럭이며 다가오고 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어디선가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모든 게 정지된 것 같은 이 바다를 핑계로 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인디언 나바호족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마법의 주문'을 걸고 있다.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러면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